★★★★☆


(스포일러 있습니다)

DVD로 감상한지가 벌써 2주 전인데 개봉작 쫓아다니고 다른 일에 치여서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봤던 영화들 가운데 하나가 '넘지 말았으면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추격자>였었고 그랬던 덕에 이 영화의 내용에 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일종의 메타-픽션 드라마입니다. 국세청 직원인 주인공 해롤드(윌 패럴)와 그의 일상과 운명을 결정하는 소설가 카렌(엠마 톰슨)이 등장하고 마침내 두 인물이 직접 만나기까지 하죠. 카렌은 원래 자기 작품 속 주인공을 매번 죽는 것으로 처리하는 '비극' 전문 작가인데 10년 만에 탈고하게 된 새 작품의 주인공 해롤드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소설의 결말을 바꾸게 됩니다. 자기가 창조해낸 허구 속 인물이 만약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작가로서의 성취를 위해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죽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그냥 넘기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하여 예술 작품이 추구하는 목표가 독자나 관객이 되는 사람이 아닌 작품 자체가 되어버림으로서 예술의 참된 가치를 잊어버리게 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는 작품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입니다. 해롤드의 상황을 도와주기 위해 개입했던 영문학 교수 쥴스(더스틴 호프먼)가 카렌의 초고를 읽고 난 후, 이 위대한 작품의 완성을 위해 해롤드가 죽어야만 한다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추격자>의 미진(서영희)도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눈을 부라렸을 것만 같습니다. 작품 속의 인물이 허구가 아닌 실제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목적성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 다행히 작가인 카렌은 평소의 괴팍한 성격과 달리 그렇게까지 잔인한 인물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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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중심 메시지는 사실 평범합니다. 내 인생의 전지적 작가는 곧 나 자신이니 내 인생의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잘 살아보자는 얘기죠. 이 한 편의 시나리오로 헐리웃에서 가장 각광받는 작가로 떠오른 이는 최근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2007)으로 감독 데뷔한 자크 헬름입니다. 첫 장편 시나리오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를 썼던 찰리 카우프먼의 독창성과 식견에 버금간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하지만 너무 일찍 감독 겸업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1) 좋은 시나리오도 결국 좋은 연출자를 만나야 멋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마크 포스터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꽤 재미있고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2) 아주 기발하다고 할 수 있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쩌면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는 복잡한 내러티브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건 통제력 있는 연출의 힘입니다. 윌 패럴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코미디언이고 주인공 해롤드를 연기하기에 부족함이 없긴 했지만 다른 배우들이 같은 연기를 했더라도 별 무리가 없었으리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3) 더스틴 호프먼, 매기 길렌할, 퀸 라피타 등이 출연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소설가 카렌 아이펠 역을 맡은 엠마 톰슨입니다. 엠마 톰슨이라고 하면 아직도 케네스 브래너와의 90년대 영화들이 주로 생각나는 편인데, 검은 옷을 즐겨입는 꼴초 여류소설가의 괴팍하고도 엉뚱한 성격을 상당히 잘 드러냈다고 생각됩니다. 원래 코미디언인 윌 패럴이 정극 연기에 도전하는 영화에서 발견한 엠마 톰슨의 코믹한 연기는 그야말로 각별한 즐거움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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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업 시나리오 작가로서 일반 관객들까지 그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던 찰리 카우프먼도 드디어 첫 감독 작품을 내놓기 위해 현재 후반 작업 중이시로군요.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Synecdoche, New York>가 금년 내로 개봉될 예정입니다.

2) 마크 포스터의 최근작은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연을 쫓는 아이>(2007)인데 3월 13일로 국내 개봉일이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는 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Quantum of Solace>의 메가폰을 잡고 한창 촬영 중이시로군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에 마크 포스터의 연출이라고 하니 정말 기대해볼만 한 작품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3) 이렇게 얘기하면 영화의 흥행 실패는 윌 패럴의 미스 캐스팅 때문이란 소리가 되는 건가요? 짐 캐리의 정극 연기가 돋보였던 <이터널 선샤인>(2004)의 성공 덕분에 가능했던 캐스팅이 아니었냐는 생각도 듭니다. 노교수로 출연하고 있는 더스틴 호프먼이 몇 년만 젊었어도 해롤드 역에 상당히 잘 맞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4 : Comment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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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Char 2008.03.06 01:17 신고

    작년 추석때 출발비디오여행에서 소개해주길래 봤습니다.
    전반부의 흥미진진함을 후반부까지 이어주지 못한거 같아서 아쉽긴했지만 재밌었습니다.

    저야 이미 봤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앞에 스포일러가 있던데 글 초반에 언급을 좀 해주시면...;;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06 02:04 신고

      뒤늦게 스포일러 경고를 넣었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재준씨 2008.03.11 12:53 신고

    저는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특히 캐릭터와 작가가 만나는 것등은 꽤 재미있더군요.

    말씀처럼 엠마 톰슨의 살짝 맛이 간 아줌마 연기도 멋있었고...아 엠마톰슨 한 때 최고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 독특한 매력은 킷힝~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11 20:53 신고

      80, 90년대에 이런 류의 헐리웃 드라마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보기 드물어진 느낌이예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 규모와 이런 내용의 영화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헐리웃도 크게 벌려야 크게 먹을 수 있는 풍조 때문인지 잘 모르겠네요. ^^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PhiloMedia 2008.07.28 14:11 신고

    트랙백하려고 보니 오래된 글이네요... 하지만 영화 고르기 전에 신어지님 글에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며 트랙백으로 신고합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30 17:50 신고

      앗 필로스님의 영화 트랙백 감사합니다. 저도 극장에서 본 건 아니고 DVD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