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실 분들은 거의 다 보셨으리라 생각하고 맘 놓고 스포일링합니다)

원작 소설에 대한 일체의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봤는데요,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혹평의 대부분이 원작과의 비교 논리로 채워지고 있는 걸 보아, 비교할 레퍼런스가 없이 본다면 의외로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좀비 영화들이 좀비 바이러스의 발병과 그 무서운 전염(?) 속도, 그리고 당하지 않으려고 싸우며 도망다니는 주인공들의 사투를 그리곤 하는 것과 달리 <나는 전설이다>는 이미 온 인류가 좀비들로 바뀐 이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당히 새롭더군요. 좀비들이 빛을 엄청나게 싫어하기 때문에 낮에는 주인공 네빌(윌 스미스)와 셰퍼드 샘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지만 밤이 되면 요새 같은 집에 숨어 좀비들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생활입니다. 어디서든 좀비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존재하지만 단 한 사람 뿐인 우리의 주인공이 햇빛 아래에 있는 한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이런 식으로만 계속 진행되면 안되겠죠. 좀비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긴 뜸을 들이지 않고 찾아옵니다. 와, 굉장히 무서웠어요. 더군다나 네빌은 좀비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치료제 개발에 힘쓰는 과학자더군요. 새로 발견한 좀비들의 아지트에서 한 마리를 생포해다가 항체 실험을 시작하면서 <나는 전설이다>의 좀비는 더이상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감을 제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전설이다>에서의 좀비들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된 것이 아니더군요. 공격 성향이 엄청나면서도 인간의 잔머리 쓰는 능력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덕분에 네빌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고 가까스로 살아남는 대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친구, 샘을 잃게 됩니다. 여지껏 윌 스미스가 출연한 영화를 꽤 많이 봤지만 <나는 전설이다>에서의 감정 연기가 단연 최고더군요. 영화가 시작부터 내내 강조해오던 홀로 남은 인간으로서의 지독한 외로움이 엄청난 설움으로 드디어 터져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의 졸도할 지경이 된 네빌은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네빌 본인 만큼이나 황당한 경험을 하는 겁니다. 아니,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전설이다>는 '정말로 홀로 남은' 한 인간이 좀비들 틈에서 어떻게 해보는 영화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 여지껏 외로움에 떨던 그 숱한 장면들과 AM 방송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그동안 정말 혼자 남은 걸로만 생각하고 여태 버텨왔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주인공이 '정말로 홀로 남은' 영화와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도 여럿 살아남았더라'는 영화는 상당히 다른 겁니다. 한 마디로 맥 빠지는 겁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해서인지 네빌은 간만에 만난 사람들 앞에서 한동안 부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그리고 영화는 인류 구원의 희망과 그것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치는 전설적인 희생 정신을 형상화하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정말로 홀로 남은' 영화가 아니어서 얻게 된 실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더 실망으로 확대되고 맙니다. (만약 '정말로 홀로 남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반전을 실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더 큰 희망이 되겠지만요)

전반적으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애초에 의도했던 바를 충실히 연출해냈고 장면마다 굉장히 효과적으로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윌 스미스의 연기도 이 정도면 거의 살신성인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나는 전설이다>는 이 지구상에 '완전히 혼자다'라는 매혹적인 설정의 힘을 중간에 놓아 버렸습니다. 물론 네빌이 정말로 완전히 혼자 남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관객 스스로가 그런 매혹을 키웠고 영화가 그걸 기대하도록 만든 겁니다. 주인공이 정말로 완전히 혼자라는 설정을 중간에 버리지 않으면서 영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전설이다>는 정말 전설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자초한 끔찍한 미래를 스스로의 힘으로 되돌리고자 한다는 내용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만 전설적인 영화로 남을 만한 강한 인상을 남기려면 좀 더 과감했어야 합니다. 원작 소설이 정말 '전설적인 작품'이라면 아마도 독자들을 이끌고 들어간 그 핵심적인 설정을 영화처럼 그냥 내다버리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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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10 : Comment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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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Stephan 2008.01.29 00:05 신고

    개인적으로는 원작의 비교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나름 수작이 될 수 있었던 작품인데, 범작이 되어버려 아쉬운 영화였습니다. 초중반의 그 좋았던 흐름과 감정이 후반부에서 한없이 무너져내리는-_-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00:07 신고

      차라리 처음부터 시시하던가, 말씀대로 초중반은 정말 좋았는데 그 좋았던 점들이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이게 다 슈렉 탓입니다. ㅋㅋ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아쉬타카 2008.01.29 01:32

    '나는 전설이다'가 아니라 '그는 전설이었다'가 되어버린 영화.
    그래도 텅빈 뉴욕의 모습은 인상적이더군요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08:58 신고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봤고 <28일 후...>에서도(거긴 런던이었죠) 봤던 장면이지만 역시 흥미진진했어요. 그런 도심속의 고립무원 판타지 같은게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N. 2008.01.29 04:39 신고

    원작소설 강력 추천드려요. 참고로, 영화와 소설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주드 2008.01.29 09:23

    텅빈 뉴욕의 모습을 실제로 멋지게 담았다는것과 간혹 나왔던 몇몇 장면들을 빼면 정말 실망스러운 영화였어요. 원작 소설을 봐야지 봐야지 했는데, 아직이네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09:42 신고

      역시 영화는 '끝까지' 잘 달려야 합니다.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원작을 몰라서 나는 참 다행이야. 우와 잼나네" 하면서 봤거든요. ㅎㅎ

  5.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까스뗄로 2008.01.29 09:30 신고

    일단 제목 보고, 전설은 아무나 하나 하면서 한 번 웃게 되네요. 소설은 많이 다르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윗분이 하셨고... 아직 고립 영화(...?) 중에는 28일 후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비현실적인 썰렁함, 스산함이라니...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09:48 신고

      예전엔 안하던 제목 짓기를 티스토리에 와서 시작했는데 본문 쓰는 것 보다 요샌 저게 더 힘들어요. 적당히 그만했으면 싶은데 웃으셨다니 계속 웃겨볼까 생각도 들고. ㅎㅎ

      <28일 후...> 대니 보일 영화를 좋아해서 좀비 영화인 줄도 모르고 봤었는데, 익숙했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꽤 재미있었어요. 요즘은 CG로 뭐 만드는 것 보다 런던이나 뉴욕 거리를 통제하고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게 더 대단해 보여요.

  6.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하류잡배 2008.01.29 09:34 신고

    저는 정말 실망이였는데 주변에 재밋다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나두 소설이나 읽어볼까....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09:50 신고

      주인공 외에 다른 생존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영화의 결말을 무난하게 잘 받아들이신 분들이겠죠. <나는 전설이다>가 의도했던 흐름을 잘 따라가신 운 좋은 분들입니다. 개인적으로 기왕 같은 돈 내고 시간 들여 보는 영화, 끝까지 재미있게 보고 나오는게 장땡이라고 생각해요. 이런저런 기준과 재해석 때문에 그러질 못하는 쪽이 손해일 뿐이죠.

  7.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페니웨이™ 2008.01.29 11:38

    '나는 혼자다'라는 논점은 전작인 '오메가맨'보다는 훨씬 더 잘 표현되었습니다. 애완견 샘의 존재감도 결코 적지 않지요.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영화끝까지 이어가는 뚝심이 부족했기에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실 원작은 블록버스터라고 부를만큼의 큰 스케일을 요구하는 작품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심리-스릴러쪽에 초점을 맞춰야 제대로 된 모양새가 나올거 같습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9 13:20 신고

      '나는 혼자다'라는 느낌이 너무 잘 표현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정서를 살리지 못해서 흐지부지 된 느낌이예요. 이 점에서는 하늘에서 외계인들이 내려와 주인공과 힘을 합쳐 좀비들과 싸워주는 내용으로 전개되었더라도 별반 차이가 없었을 듯 싶습니다. E.T.들이 떼거지로 내려와도 좋고요 제다이들이 등장해도 괜찮. ㅎㅎ

      원작을 그대로 살린 리메이크가 다시 나와준다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절대 책을 읽기 싫어서가 아니라요...

  8.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천군 2008.01.29 18:24

    기본은 했던 영화였다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윌스미스가 나오는 블록버스터로서는 혹평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가 아닌데 말이죠. ㅎㅎ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30 09:51 신고

      저도 한편의 영화로서 기본기는 충실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초중반이 너무 고충실이었기 때문에 헐리웃 상업영화의 전형으로 빠지는 후반부가 불만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국내 흥행은 블럭버스터라고 하기 어려웠지만 투자비 규모가 큰 영화라는 점에서는 블럭버스터에 해당하는 작품이지 않을까요? 그랬기 때문에 '걸작 지향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9.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Sunny21 2008.01.29 19:34

    여기 아직 안본 사람 1人 추가요 ^^;

  10.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누들스 2008.01.30 00:00

    스튜디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오리지날 엔딩이 공개되길 기대해봅니다.

    그럴사한 연출에 만족하며 보다가..
    그 결말이야 그렇다 치고 유리창 깨지면서부터 몇초간의 장면은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30 09:55 신고

      DVD 발매를 통해 감독판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이신가요? 마지막 몇 장면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에 디렉터스컷을 본다 하더라도 이번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전체적인 만족감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유리창 깨지면서부터 몇초간의 장면" 이건 네빌이 처음 좀비들과 맞부딪혔을 때 말씀하시는 거죠? 좀비들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드셨나 봅니다. ^^

  1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슈리 2008.01.31 14:36 신고

    보고난 직후에 액션밀도가 낮아서 그닥 괜찮지 않았는데 또 드라마쪽으로 생각해보면 괜찮았던 것도 같네요. 역시 감상이란게 두고 생각해볼일인것 같습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31 15:50 신고

      영화를 보는 중에, 막 끝난 후에, 하루가 지난 후에... 때로는 몇 년이 지난 후의 느낌과 기억이 다 다른 경우도 있더라고요. 저는 그 중에 영화를 막 보고난 후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참 지난 뒤에 뭔가 더 발견하고 아하, 뭐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 늦어요. 영화는 보는 중에 그리고 끝나는 순간에 관객들에게 다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저는 영화 보고나서 글 쓰기 전까지 시간이 지날 수록 영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생각이 흐르는 경향도 있었는데 다른 분들의 실망 글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란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막 끝난 후에 가졌던 밍숭섭섭했던 느낌을 기준으로 정리했어요. 물론 보신 분에 따라서는 달리 볼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 작품이지만요. ^^

  1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cutnpaste 2008.02.03 20:56 신고

    하하, 맞아요. 나는 전설이다를 끌고가는 큰 줄기 중에 하나가 혼자 살아남은 인간인데, 결국엔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착각하는 한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 생각해보니 좀 황망하네요. 전설이라는 것이 후세에 전해져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고보면 에필로그에는 재건에 성공하는 인류의 모습들이 있을 것이고. 억지로 그를 전설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서 말도 안되는 죽음을 숭고히 받아들이는 씬을 만든 듯.
    이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대가리와 꼬리가 따로 노는 격이네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2.03 22:29 신고

      뭐 그래도 바깥 어디엔가는 살아남은 다른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희망에 방송을 하긴 했으니까 꼭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만 볼 수는 없죠. 하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관객들은 그 착각에 기반한 환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환상이 어떻게 전개될런지 궁금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던 걸로 밝혀져 버리는 거죠. 그말이 그말인가요? ㅋㅋ

  1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제노모프 2008.02.09 01:55 신고

    저는 영화를 재밌게 본 편이지만 신어지님의 의견에도 동감합니다. 생존자가 더 있다는 부분(저는 여자와 아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생존자 마을이 있다는 것에는...)에서 느낀 허탈함도 어느정도 있었구요.
    근데 솔직히 말해보면 윌 스미스의 영화라고 놓고 본다면 종교의 영역(?)에도 다다른 결말도 최악은 아닌 것 같아요(<아이 로봇>의 동급 내지 <인디펜던스 데이>보다는 백 배 나은). 또 저는 적어도 감독의 전작보다는 훨씬 낫다고 보고 있습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2.09 19:00 신고

      여자와 아이가 나타났을 때에는 어? 그렇다면 저렇게 해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다는 얘긴가 했다지 뭡니까. ㅋ 네빌의 AM 방송이 "나는 뉴욕의 유일한 생존자다"라고 시작되는 걸 보면 앞뒤가 안맞는 내용은 아니었는데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립무원의 느낌이 '너무 잘' 표현됐던 거 같네요.

      저는 마지막에 나비 모양이 나타나고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 없어요. 본래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언제든 그런 "싸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