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는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1923 ~ 1971)의 삶을 소재로 한 픽션입니다. 생각해보면 요즘 실존 인물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치고 픽션이 아닌게 거의 없습니다. 전기영화라는 명목 하에 만든 영화가 괜한 구설에 휘말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각색된 허구라고 하자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00% 사실에만 기초해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를 만든다는 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그다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영화의 재료가 되어준 실존 인물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재구성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바람직한 접근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음악가였다면 그의 음악을, 그가 화가였다면 그의 미술 작품들에 관객들이 좀 더 쉽고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역할을 최근의 많은 "예술가 영화"들이 시도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어차피 한 편의 영화인 이상,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볼만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야 할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 내용을 약간 첨가하여 극적 구성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다이앤 아버스의 삶을 소재로 한 <퍼> 역시 그의 사진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한 편의 인생 드라마로서의 성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자 시도한 작품입니다.

48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이앤 아버스는 그 인생 전체를 영화화했더라도 괜찮았을 만큼 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퍼>가 집중하는 것은 다이앤 아버스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 전체가 아니라 어떻게 한 남편의 아내이자 두 딸의 어머니였던 그녀가 전업 사진작가의 길을 뒤늦게 걷게 되었느냐는 부분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에 영감을 주었다는 쌍동이 소녀의 사진을 비롯해 다이앤 아버스의 많은 작품들은 소위 '비정상'인들로 취급받던, 그리하여 대중들의 시야에 거의 포착되지 않고 있던 인물들을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의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미국 내에서 그와 같은 사진들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리라는 점은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현재 사진 예술은 다이앤 아버스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다른 경향을 띄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퍼>가 상상하는 다이앤 아버스의 단면은 그가 사진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동시에 그와 같은 다이앤 아버스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가공의 인물이 다모증으로 온 몸이 털로 뒤덮인 남자 라이오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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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의 모피 패션쇼에서 털코트를 바라보는 참석자들의 시선과 태도는 대상의 물적 가치에만 몰두하는 사회의 통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디앤(니콜 키드먼)은 털복숭이 남자 라이오넬과의 만남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의 모습들을 발견되죠. 라이오넬과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외면 당하거나 배척받으며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디앤이 자기 안에 갖고 있던 모순을 돌파하고 솔직한 자기 욕망을 이끌어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디앤이 억압되어 있던 자기 욕망을 발견하고 사진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있게끔 격려해준 라이오넬은 <퍼>를 예술가 영화를 넘어 인간 드라마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디앤의 내적 갈등이 라이오넬을 만나면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게되고 자신의 가족들과는 어떻게 충돌하는지에 집중하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죽음을 앞에 둔 라이오넬에게로 중심 이동을 합니다. 온 몸을 덮고 있던 털을 모두 깎아낸 라이오넬의 모습은 곧 다이앤 아버스의 카메라에 포착된 피사체들의 본질과 작품의 의도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괴물로서 왕따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살아온 세월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디앤의 첫 인물 사진으로 남게되는 "라이오넬"은 본 모습을 드러낸 외로운 한 인간의 초상입니다. 디앤은 그런 라이오넬과 마침내 침대 속에서 한 몸이 되고 바다 속으로 떠나 보내게 되죠.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들은 피사체의 외면 속에 감추어진 인간성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 <퍼>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작품들에 관한 해석인 동시에 전형적인 여성 판타지를 선보이고 있는 멜러 드라마이기도 한 <퍼>는 패트리샤 보즈워스의 84년 베스트셀러 <다이앤 아버스 : 전기>를 원작으로, <세크리터리>(2002)의 작가 에린 크레시다 윌슨과 감독 스티븐 샤인버그가 4년 만에 다시 팀을 이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스티븐 샤인버그의 삼촌 로렌스 샤인버그가 다이앤 아버스와 절친했던 사이였고 그 자신도 어릴 적부터 다이앤 아버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어왔다고 하네요. <퍼>의 비주얼은 실존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자의식 때문인지 유난히 빛의 예술로서의 매력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샘 레이미 감독의 <다크맨>(1990)으로 영화 데뷔를 하여 <매트릭스> 3부작과 <스파이더맨> 2, 3편에 참여한 빌 포프가 촬영감독을 맡았습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막상 맨 얼굴을 내보이는 장면이 얼마 없지만 디앤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그 표정 하나 만으로도 뛰어난 배우임을 증명하고 있고요, 니콜 키드먼은 오랜만의 팔색조 연기를 펼치며 그간의 부진을 만회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라이오넬과 대면하고 돌아섰을 때 위험한 선 위에 버티고 선 듯한 평범한 주부의 넋나간 표정과 영화 마지막에 클로즈업되는 거칠 것 없는 사진 작가의 야수 같은 표정은 같은 배우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인상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비평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얻은 작품은 아닙니다만 예술가 영화인 동시에 한편의 드라마이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지에는 성공적으로 도달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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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4 : Comment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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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tmrw 2008.01.20 01:22 신고

    영화 괜찮을거 같네요.
    니콜키드만은 자살한 재능있는 여성 역할을 잘 맡네요.ㅋㅋ
    지난번 디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역도 그렇구요.

    근데 참.. Fur가 그 Fur라니, 약간 쇼킹하네요.ㅋㅋㅋ
    사진촬영하는 장면이나 사진작품들이 나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거 같은데 맞나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01:36 신고

      그러게요. 저도 <디 아워스> 생각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퍼>는 다이앤 아버스의 죽음하고는 거리가 멀고요 사진 작가로서의 입문 과정(?)에 관한 내용이예요. 다이앤 아버스가 자살했다는 건 글을 쓰면서 따로 찾아보고 알게 된 겁니다.

      퍼가 그 퍼 맞아요. 그러나 모피 반대 운동가들에게 지탄 받을 내용은 안나옵니다. ㅋㅋ 주인공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는 하는데 셔터 누르는 장면은 별로 안나와요. 영화 후반부에 사진 찍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무척 인상적입니다.

      조금 전에 <스위티 토드> 보고 들어왔는데 <우생순>을 볼걸 그랬나 싶었어요. ㅋㅋ 세 영화 중에 <퍼>가 젤 볼만 한 것 같습니다. <우생순>도 궁금하긴 한데 뭐 굳이... 하는 생각 때문에 안보게 되네요.

    • addr | edit/del BlogIcon tmrw 2008.01.20 20:13 신고

      전 오늘 츄리닝입구 집앞에 나가서 결국 우생순을 보고야 말았네요.ㅋ
      음..제 생각에도 FUR가 제일 나을듯해요. -.-;;
      우생순은...개인적으로 별점을 매겨준다면, 두개반...
      그나마 순전히 연기자들의 연기덕에 두개반이라도 주고는 싶어요.ㅋ.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21:01 신고

      우리나라 영화들은 그런 정도일 때 대박이 잘 나더라고요. ㅋㅋ
      <퍼>도 좋다는 분도 있고 기대에 못미친다는 분도 계시네요.
      <스위니 토드>, <우생순>과 비교하면 젤 나은 선택이긴 했지만
      으악 이 영화 최고다! 그런 정도는 아니니까 보시게 되면 걍 편하게
      보시면 될 듯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투모로우님을 믿어요 ㅎㅎ (뭘?)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Stephan 2008.01.20 02:00 신고

    이 영화에서는 비록 비주류 인생지만, 다른 영화에서는 억만장자 토니 스탁이 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지요~ 슈퍼히어로도 비주류인생이려나;; (배우가 맡는 역도 역시 인생 한방;;)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02:09 신고

      <아이언 맨> 말씀이신 거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수퍼 히어로 블럭버스터 영화에도 출연하다니 이거 좀 대견스러운 걸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까스뗄로 2008.01.20 08:14 신고

    리뷰를 보니 더 기대가 되는군요. 저는 내일 볼 예정이에요. (서울 한 번 가려면 날 잡아야 해서요. 아하하, 영화 한 편 보기 힘드네요.) 빛에 예민한 비주얼이나, 주부에서 작가로의 강렬한 변모 정도만 봐도 만족스러울 거 같네요. 소재도 그렇고 하니, 아주 재미있기를 바란 건 아니니까요.
    스위니 토드는... 별로던가요...? 신어지님은 어쩐지 뮤지컬 영화는 좀 꺼리실 거 같기도 한데... 아, 아니,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뻘뻘...)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15:47 신고

      아,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까지. 하지만 설마 영화만 보러 그 먼 길을 다니시는 건 아니겠죠. 겸사겸사 좋은 나들이 되시길 바랄께요. <퍼>에서 기대하고 계시는 것들은 다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뮤지컬이라고 해서 무조건 꺼릴 수가 없는 건 그대로 좋았던 작품들도 몇번 있었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팀 버튼과 조니 뎁이라니. 그래서 어제 저녁에 <스위니 토드> 봤는데 저는 별로였습니다. 차라리 <우생순>을 볼 걸 그랬다지요. 나중에 간단하게 리뷰 올릴께요. ㅠ.ㅠ;;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빈상자 2008.01.20 16:31 신고

    영화를 보고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왜 라이오넬이 '털복숭이'가 되는 병이 있고 털을 밀어버리면 말끔한 남자가 되잖아요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면을 상징하는 건 알겠는데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들의 관점에서 '정상적인' 면으로 돌아설 수 없는 라이오넬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애우들은 항상 '천사'라는 강박관념을 주는 우리 영화들의 인물들처럼 조금 불편했어요.
    왠지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는 '비정상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정상적인' 것이라 믿는 것을 찾고 과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편파적 시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영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한 점에서 영화 <퍼>에서 아버스의 사진 모델이 된 친구들이 천장을 통해 환하게 내려오는 장면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동안 그들을 좀비와 같은 괴물로 어두운 지하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했던 수많은 영화들과는 너무도 다르죠.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17:32 신고

      정상 & 비정상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측면에서는 최근에 봤던 <Mr. 후아유>에 비해 월등히 나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럼에도 굳이 라이오넬의 털을 깎는 과정이 필요했겠느냐는 데에는 의문이 남는데요, 제가 생각엔 다이앤 아버스의 삶이나 작품 활동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털을 밀어낸 라이오넬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정상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온 몸에 남은 모습이잖아요. 한 인간의 온전한 영혼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아온 영혼의 모습처럼 보이더군요. 다이앤 아버스의 작품들이란 '비정상'으로 규정된 사람들도 정상이다라는 관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겪어온 사회적 소외에 대해서도 주목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싶네요.

      라이오넬이 그 자체로 정상적이라는 주장을 하려했다면 털을 안깎은 상태에서 디앤과 라이오넬이 동침하도록 하는 것이 맞는게 아니냐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이거 무슨 츄바카와 레이아 공주의 베드씬이냐고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하지만 그게 더 맞는 건데) 그리고 털을 깎아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맨 얼굴도 좀 보여줄 수 있는 거고요. 나름 현실적인 타협의 결과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

      실제 다이앤 아버스의 집 위에서 그들이 내려오는 일은 없었겠지만 실제 사진 작품들을 영화 속에 사용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앞으로 등장하게 될 피사체들을 실제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영화 전체가 다이앤 아버스의 실제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내면적 변화를 '표현'해낸 작품이란 생각도 들어요. 사실 다이앤 아버스야 말로 겉으로만 '정상적'이었지 속으로는 진짜 '비정상적'인 욕망에 시달렸던 인물이었으니까요.

    • addr | edit/del BlogIcon 빈상자 2008.01.20 23:35 신고

      신어지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그렇죠? 그런거겠죠. 아무래도 이성만 가지고는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킨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적당한 선에서 대중들에게 보다 익숙한 비유와 상징이 필요했었으리라 봅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23:46 신고

      영화라는 매체에 있어서 만큼은 독선적인 표현 방식이나 강요는 왠만해선 미덕이 될 수 없다고 봐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화법을 고민하고 구현해내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이나 사진과 달리 영화는 돈도 많이 들고 스텝 인원들도 많이 참여하는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기 하고요. <퍼>도 소재의 선택이나 내용 자체가 그리 많은 관객들을 목표로 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캐스팅에서부터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자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 영화였어요.

    • addr | edit/del BlogIcon 빈상자 2008.01.21 01:02 신고

      사실 제 생각은 대중이 어려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독선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규정하기는 조금 어렵다고 봅니다. 현대에 와서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거대 자본으로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그러한 이유로, 혹은 '대중예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진 창의력을 제한하고 묶어둘 수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신어지 말씀대로 <퍼>도 니콜 키드만의 캐스팅에는 분명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겠지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1 08:10 신고

      당대의 관객들이 어려워했다는 이유만으로 독선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죠. 독선적이다 아니다라고 하는 건 다소 낯설고 어렵더라도 그런 표현 방식이 새로운 영화 문법으로 정착될 수 있다면 오히려 선도적인 표현 방식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독선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결과론인 것 아닐까요. <퍼>의 경우 라이오넬이 털을 안깎은 채로 디앤과 잤으면 그건 틀림없이 독선적인 표현 방식으로 낙인 찍혔을 겁니다. 감독이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걸 실현하기 전에 제작자들과 스텝들이 제발 그러지 말자고 부탁을 했을 것이고 배우들조차 거부했을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이해관계자가 많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다른 장르에서 보던 것과 같은 예술적 창조 활동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도 저는 사실 의문이예요. 영화에 예술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저도 관객으로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영화가 정말 예술인가, 예술로서 만들어지고 수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빈상자 2008.01.21 12:38 신고

      만들어지고 수용이 되는 과정에 의한다면 사실 영화는 물론 사진이든 미술이든 모두 예술로서의 의문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결국 우리가 소위 예술이라고 하는 매체들을 소비하는 데는 분명히 반성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으로 매체의 본질까지 완전히 다 바꾸어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은 예술지향성이라는게 무언지 많이 혼동스러워요. 그게 최선인지도 의심스럽구요. 그러한 점에서 저는 오히려 흔히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라고 하는 것들의 사이에서 적정한 균형을 이루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는 더 관심을 갖고 있죠. 그래서 저는 <퍼>의 여러가지 선택에 상당한 공감을 갖고 있지만 털을 깍아낸다는 점에선 개구리왕자의 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갖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관객과 스텝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만으로 작가들이 그 모든 걸 수용해 나간다면 아마 우리에겐 스탠리 큐브릭도 데이비드 린치도 없었지 않았나 싶어요.

      흠...의도했던건 아닌데 괜히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버렸네요^^ 제가 보기엔 저와 신어지님과의 영화에 대한 인식에 대한 차이는 별반 없어보이기는데 영화를 어떠한 면에 근접한 형식으로 보느냐가 조그만 차이를 만드는 듯 싶어요. 저도 영화에 대한 이상을 버린지는 오래되었지만 어떠한 점에선 너무 대중(이라기 보다 자본)에게 휘둘려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지금 흔히 대중영화라고 하는 것과 불과 20-30년전에 나온 대중영화들의 성격만 비교해도 상당히 우울한 결과가 나오더라구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1 13:05 신고

      '개구리 왕자의 변신'이라는 말씀에,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여성 판타지라는 언급을 글에서 하긴 했지만 라이오넬에게 찾아가는 과정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도 보이고 미녀와 야수처럼 둘이 지내다가 결국 개구리 왕자와 인어 공주의 슬픈 전래동화로 마무리된 거 아니냐는 ㅎㅎ

      정말 얘기가 댓글로 주고 받기에는 좀 어려운 쪽으로 나와버렸어요. 워낙 제한적이고 오해의 여지도 많은게 댓글이라 더 장황해지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영화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술 영화란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기왕 얘기하려면 정확한 개념 정의부터 해두어야 하고, 더군다나 이런 얘긴 거의 이틀 밤을 새면서 해도 모자르잖아요. ^^ 하지만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다 보면 항상 질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20~30년전 대중영화들과 지금의 대중영화 비교라니... 우왕 이것도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가 될텐데 또 장황해질까봐 여기까지! 하고 말겠습니다. ^^; 의도하셨던 게 아니라고 하시지만 덕분에 좋은 말씀 나눴습니다. 언제든 더 좋은 기회에 많은 얘기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빈상자님, 좋은 한주 되시고요.

    • addr | edit/del BlogIcon 빈상자 2008.01.21 14:40 신고

      ㅎㅎ 댓글로 이긴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멋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왠지 신어지님의 블로그는 이런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져요. 제 블로그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거든요.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이는 느낌입니다. 휴~. 신어지님도 좋은 한주 보내세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2 00:11 신고

      좀 더 느긋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기도 합니다. 말뜻이 잘못 전달될까봐 괜히 조심스러운 것도 있고요. 하지만 언제든 이야기하고 싶으신 거 있으면 다 풀어놓으셔도 됩니다. ^^

  5.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smirea 2008.01.20 21:21 신고

    신어지님~ 저도 트랙백 걸고갑니다요.
    신어지님은 정말 집중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제가 살짝 덜 재밌게 본것도 어쩌면 집중력이 약한 탓일지도 모르겠어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0 22:14 신고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도 영화 보는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경우가 태반이예요. 정말 좋은 영화라면 상황에 상관없이 좋다는 말도 통하지만 그 정도까지 압도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밥 먹고 봤냐 배고플 때 봤냐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어요. 네, 저 <퍼> 볼 때 컨디션이 상당히 괜찮았답니다. ㅎㅎ

  6.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주드 2008.01.21 10:15 신고

    스포일러가 있다는 말에 그 전까지만 읽고 스크롤을 내렸답니다. 최근들어 다시 주목하게 되는 배우 '니콜 키드먼'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이앤 아버스'의 전기 영화라는 점에서 정말 보고 싶은 영화에요. 예전에는 이런 영화들 개봉하자마자 극장에 달려가서 보곤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열정도 점점 식어가는것 같아서 저 스스로에게 아쉽네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1.21 10:40 신고

      다이앤 아버스의 사실적인 전기영화는 아니고 원제 그대로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상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꽤 설득력도 있게 보였고 마음에도 들었어요.

      이와 같은 '영화들의 세계'를 한창 발견해나가던 때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렇죠. 점점 예전의 첫 경험을 되살려주는 임팩트있는 작품들 만나기가 어려운 건 인지상정인 것 같아요. ^^

  7.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섬연라라 2008.01.31 14:56

    호오.. 오랜만에 꼭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네요. 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