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
감독 자우메 발라구에로, 파코 플라자 (2007 / 스페인)
출연 마누엘라 벨라스코, 비센테 힐, 페랑 테라자, 파블로 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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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에서 온 좀비 영화입니다. <클로버필드>(2008)는 결국 안보고 말았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좀비가 출몰하는 상황을 카메라맨이 녹화하는 방식으로 촬영한 작품이라더군요. 그러니까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현장에 함께 하고 있는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기획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획 의도는 고화질의 필름 영상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제작비 절감의 효과도 거둘 수 있으니 1석 2조라고 할 수 있죠. 스페인의 실제 TV 프로그램인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소방서에서 촬영을 하다가 좀비 사건이 발생한(정확히는 발생하게 될) 아파트 안에 갇힌다는 설정인데요, 스페인 관객들이 볼 때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포맷에 담긴 좀비 상황극으로 보였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그다지 현실감있게 느껴지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공포 영화에 너무 몰입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다보니 그랬던 것일 수도 있겠고요. 그럼에도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닌 영화다, 라는 자기 암시를 굳이 써야 할 정도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이.씨>의 비용 절감 노력은 필름이 아닌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직 한 건물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도록 짜놓은 각본에서도 돋보입니다. 구호 요청을 받은 소방관들과 함께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출동한 아파트는 이제 막 좀비 사건이 시작된 현장이었던 것이죠. 문제는 이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경찰들이 아파트를 폐쇄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경찰에서 이렇게까지 신속한 대응을 하게 되는 경위는 나중에 설명이 되긴 합니다만 이건 다분히 '이 영화는 건물 밖으로 나갈 의사가 없다'라고 미리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져 상당히 서운했습니다. <28일 후...>(2002)나 다른 좀비 영화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선사해주는 '좀비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바뀌어 버린 황당한 광경'을 <알.이.씨>에서는 볼 수가 없다는 얘기였으니까요. <알.이.씨>는 그와 같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커녕 너무 좁은 공간 안에서만 모든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약간 답답한 기분마저 들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좀비가 되느냐 마느냐의 절박한 상황 속에 빠진 1인칭 시점의 카메라이긴 하지만 여전히 3인칭으로 보이는 점 역시 아쉬움입니다. 워낙에 경험 많은 전문 카메라맨이셔서 그런 걸까요. 영화 중간에 기록된 영상을 되감아서 보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이때 고속 되감기가 되어 한번 봤던 장면을 다시 보고 이후에 앞으로 빨리 감는 부분은 명백한 실수입니다. 그러니까 <알.이.씨>의 관객은 남겨진 기록 영상을 보는 것이어야 했는데 이 장면은 테입에 기록된 그대로가 아니라 LCD 화면을 보고 있는 카메라 기사의 시선이기 때문이죠. 만약 카메라 렌즈가 아닌 기사의 시선으로 보는 영화였다면 중간에 카메라 없이 리포터나 다른 인물들을 보는 장면들이 섞였어야 맞을 겁니다. 그러나 <알.이.씨>는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전부 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입니다. 그리하여 <알.이.씨>는 성공적인 훼이크 다큐멘터리가 아닌, 그런 척을 했던 영화가 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건물 안에는 갇혔지 사람들은 하나 둘씩 좀비가 되어 가지, 상황은 갈 수록 점입 가경이 되어가지만 <알.이.씨>의 카메라는 그다지 큰 몰입도를 안겨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3인칭의 시점으로 느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런 의도된 설정을 이미 의식하면서 보고 있는 제 탓이 컸습니다. 안타깝게 일이 꼬인다는 느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정된 수순을 밟아나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알.이.씨>는 마지막 맨 꼭대기 층에서의 씨퀀스에 이르러 결국 엄청난 서스펜스를 안겨줍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전기불을 안켜고 카메라 라이트에만 의존해야 했는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아무튼 이건 뭐 <블레어 윗치>(1999)로 보는 원조 좀비와의 정면 대결이라고 해야 하나요. 마지막 짧은 몇 분 동안에 갑자기 서스펜스의 강도가 급상승을 해버리니 머리통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사실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이 무엇 때문이냐라는 건 좀비 영화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군사용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든 유전자 변형에 의한 것이든 대충 납득할 만한 정도의 설명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이.씨>를 보면서도 저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이 무엇인지는 크게 궁금하지가 않았습니다. 상황의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데에 중점을 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 없이 상황을 종료시켜 버린다고 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알.이.씨>는 나름의 독창적인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을 설명해주기까지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여기에 원조 좀비의 끔찍한 모습을 야간 투시경으로 감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니 좀비 영화로서 이만한 호사가 따로 없겠다 싶을 지경입니다. 이 장면에서 만큼은 여지껏 한걸음 물러선 3인칭 시점으로 좀비들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정면으로 좀비와 맞닥뜨리기까지 하니 <알.이.씨>의 기획 의도가 제대로 살아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발빠른 헐리웃이 <Quarantine>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작을 만들어 올해 10월로 개봉 일자를 잡아두고 있네요. LA를 배경으로 하는 리메이크작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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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3 : Comment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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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배트맨 2008.07.12 11:36 신고

    올 여름 시즌에 볼 호러 영화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영관을 나설때 좀 실망스럽더군요. 객석의 반응도 대체적으로 썰렁했고요. 호러 영화는 곳곳에서 비명이 터지고 그래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데 말입니다. ^^* <블레어 윗치>와 <클로버필드>는 정말 스릴감 만점이였는데, 이 작품은 연출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12 16:23 신고

      사실감도 떨어지고 영화의 질감이랄까, 우리가 극장 개봉작에서 기대하는 평균적인 수준에 비해 밀도가 좀 약하긴 하죠. 저는 그래도 마지막 밀실 장면에서 만큼은 숨도 제대로 못쉬었네요. 영화 전체가 그 장면을 위해 쌓아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장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설정의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카메라 앞으로 좀비가 달려들 때에야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이를텐데 카메라맨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지 않습니까. ^^

    • addr | edit/del BlogIcon 배트맨 2008.07.12 17:23 신고

      그러고보니 엔딩 크레딧에는 '특별 출연 : 골룸'을 삽입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마지막 그 장면 보면서 '어 저 친구가 왜 저기 가 있어?' 했네요. 비슷하지 않았나요?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12 20:05 신고

      ㅋㅎ 굉장히 씨니컬하게 보셨군요. 장르의 관습에 따랐으면 통상 영화 중반쯤 암시를 주거나 했을 내용인데 맨 마지막에 가서 급작스럽게 밝혀지니 특별히 동정을 할만한 여유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필그레이 2008.07.15 17:44 신고

    볼까말까했는데 뭔가 안보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요.보고자하는 영화들을 꽤 놓치고 살고있어...이거원...ㅜㅠ 좀비 영화는 대부분 보는 편인데요.게다가 윗분 보니깐 웬 골룸...ㅡㅡ;골룸은 정말 여기저기 좀비 영화에서 잘도 등장해주시던데...이 영화도 그런가보군요.헉.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15 17:58 신고

      '극장 나들이'를 후회하지는 않았으나 타인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꼭 보시라고 권해드릴 만큼은 아닙니다. 그나저나
      좀비 영화는 대부분 보는 편이시라니, 필그레이님 알면 알수록
      참 남다르시다능. ^^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필그레이 2008.07.23 19:20 신고

    남다르실것까지야.ㅋㅋㅋ 원래 공포영화 좋아하는편이라서요.좀비든 뭐든 암튼 안가리고 잘 봅니다.^^;;;

    아무래도 시점이 모호했던 것 같아요.3인칭이긴한데 또 어느장면에서 안그랬던것같기도하고말예요.크게 놀랄만한 걸 바라진 않았지만 약간 싱거웠던 것 같긴해요.마지막 장면도 사실 크게 놀랄만한 정점이 되진 못했단 생각도 들고말예요.

    오래전 블레어 위치 를 봤을 떄의 충격은 이쪽 핸드헬드쪽에선 최고였던 것 같아요.비슷비슷하게 관련 공포영화가 나오긴하는데 밋밋한 느낌이예요.-_-그래도뭐 비오는 주말저녁 이정도 좀비영화였으면 괜찮은 선택이었다싶었어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23 21:43 신고

      1인칭의 시점샷으로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그다지 긴박하게 느껴지는 편이 아니죠. 전반적으로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할까요. 저는 그나마 마지막 옥탑방 장면에서 만큼은 긴장이 꽤 많이 되더라고요. 헐리웃 리메이크 버전이 좀 보고 싶은 이유는 <알.이.씨>에서의 무덤덤한 서스펜스가 혹시 그쪽에서 만들면 어떻게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궁금증 확인 차원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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