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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2007년작 <이스턴 프라미스>를 DVD로 봤습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아껴두고 있던 곶감을 드디어 빼먹은 셈인데요, 그 맛과 향이 아주 기가 막힌 작품이네요. 이런 웰메이드 장르 영화가 아무런 기약 없이 국내 미개봉 상태라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출연 배우들의 면면도 굉장히 훌륭한 편인데 말이죠. 감독의 전작 <폭력의 역사>(2005)에 비해서도 <이스턴 프라미스>는 좀 더 전통적인 장르물의 내러티브와 구성 요소들을 고루 갖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 영화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인데 해외 영화제에서 아무런 수상 이력도 없고 해서 아직까지 수입조차 안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영화는 DVD 직출시 보다는 차라리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극장 개봉 시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999년작 <엑시스텐즈> 이후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파이더>(2002)는 패트릭 맥그래스가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고 <폭력의 역사>는 존 와그너와 빈스 로크의 그래픽 노블을 조쉬 올슨이 각색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스턴 프라미스>는 영국 출신 작가인 스티븐 나이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작품이고요. 어찌 보면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점을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면도 있지만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한 장인의 솜씨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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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녀의 출산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일기장을 시작으로 런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들의 치부를 파헤치는 범죄 드라마입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가 마피아 집단을 내부 시각에서 다룬 작품이었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들의 몰인간성을 외곽으로부터 통렬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14세 소녀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가족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의 정체 등에 관한 의문들을 붙들고 진행되는 스릴러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연출은 서스펜스의 창출 보다는 극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긴 니콜라이가 함정에 빠져 목욕탕에서 체첸계 암살자들과 맨 몸으로 혈투를 벌이는 장면은 영화 속 유일한 액션 장면이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 그대로 대단한 개싸움을 펼쳐 보입니다. 그에 앞서 니콜라이가 런던의 러시아 마피아 보스들 앞에서 입단 신고를 하며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그들 조직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씨퀀스라고 생각됩니다. 어린 소녀가 남긴 간난 아이의 미래에 대해 "노예가 노예를 낳을 것일 뿐"이라고 내뱉는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극악한 면모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약자들의 삶을 그런 식으로 짓밟는 자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스턴 프라미스>의 결말은 비교적 낙관적인 편입니다. 대놓고 권선징악의 순진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세대가 바뀌면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드러낸다고 할까요. <이스턴 프라미스>를 대중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근거도 다수 관객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영화의 낙관적인 결말 때문입니다. <폭력의 역사>에서 순진남의 외양 속에 치명적인 폭력의 개인사를 품고 있었던 비고 모텐슨이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그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중심에 서고 벵상 까셀과 나오미 왓츠도 비극의 악순환을 중단시키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우린 애들은 해치지 않아." 유모차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우리나라 시위 진압 경찰들 보다는 러시아 마피아들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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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주변 인물들 가운데 파키스탄계 이발사 부자가 등장하는데요, 약간 덜 떨어진 17살짜리 아들이 아스널의 팬으로 나오더군요. 첼시와의 경기 티켓을 구했다고 좋아라 하다가 경기 당일 거리를 행진하는 첼시 팬들의 틈에 끼어서 홀로 아스널을 응원하는 모습이 불안 불안하더니 묘지에서 오줌을 누다가 체첸계 암살자들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검은 가죽옷의 체첸계 암살자들은 그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산에서 막 내려온 늑대" 같다고 합니다. <넘버 3>(1997)에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던 송강호와 불사파 꼬붕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Eastern Promises (2007) directed by David Cronenberg official trailer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5 : Commen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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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8/12/14 01:35 tracked from 배트맨이 들려주는 이야기. 레이첼도, 알프레드도 없...

    마피아를 다룬 작품들중에서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오늘날까지도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수작이라고 일컬어지는 &lt;대부&gt; 트릴로지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합니다. 각색이 비교적 대중적으로 이루어진 편이고, 탄탄하며 섬세한 연출 또한 부드럽게 진행이 되는 편이기 때문에 별 다른 거부감 없이 감상할 수 있었던 명작이였습니다.이 작품은 런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nbsp;러시아 마피아를 다루고 있더군요. &lt;대부&gt; 만큼은 아니였지만 기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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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데이빗 크로넨버그 |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

    2008/12/14 04:03 tracked from Cinema Blues

    포스터부터 포스가 남다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현재 러시아 및 유럽 전역에서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오르가니자치야'라고 불린다) 중 최대 조직인 보리 V 자콘 파를 소재로 한다. 자료들에 의하면 보리파는 구소련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세력을 키웠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 옛 소련땅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 급부상했다. 러시아 마피아 중 보리파가 아닌 신흥조직들도 대체로 보리파의 영향을 받았다. 영화에서 묘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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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 2007) - 데이빗 크로넨버그

    2008/12/15 14:40 tracked from BlueWeiv

    이스턴 프라미스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2007 / 미국) 출연 비고 모르텐슨, 나오미 왓츠, 뱅상 카셀, 아민 뮬러-스탈 상세보기 크로넨버그의 폭력에 대한 연작물중에서 두 번째이다. 첫번째는 아시는 바와 같이 폭력의 역사다. 비고 모텐슨이 역시 주연이었던 그런 이야기다. 2007/09/18 - [Movie] - 폭력의 역사 - 데이빗 크로넨버그 배경은 런던이며 주인물들은 러시아 인들이다. 러시아에서 런던으로 온 14세 소녀가 죽으면서 그녀가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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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리뷰]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

    2008/12/30 18:25 tracked from 스테판's Movie Story

    영화 "이스턴 프라미스"는 팬들이 이름 붙이길 전작 "폭력의 역사"에 함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 2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폭력의 역사"에 이어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다시한번 의미심장한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폭력의 역사"와의 관계성은 단순하게는 주연배우에 있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이 수반된 악행에 젖어살던 과거를 잊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톰 스톨을 연기했던 비고 모르텐슨이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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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이스턴 프라미스 - 폭력의 미학

    2011/08/31 16:14 tracked from 영화중독자 칼슈레이 : 손 끝으로 보내는 당신을 향...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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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주성치 2008/06/30 09:56

    사우나 격투씬은 정말 최고의 맞짱씬이라고 생각합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6/30 12:36

      좀 다르긴 하지만 <똥개>에서 정우성의 감방 맞짱씬이 생각나더군요.
      비고 모텐슨의 열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필그레이 2008/06/30 11:57

    오우- 굉장히 재밌을 것 같네요.중간중간 씬들 설명에도 볼만한 장면들이 급 눈에 선해지는 것이...볼 수 있는 방법을 좀 찾아봐야겠어요.안그래도 영화를 요즘 도통 못봤더니...더더욱 보고싶은 영화가 줄어드는 것이 씁쓸했거든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6/30 12:39

      조금 기다리셨다가 극장 개봉 시에 보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DVD 직출시도 아니고 수입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걸 보면 직배사에서 개봉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거든요. 사실 요즘은 영화 보다 현실이 훨씬 스펙타클하죠. 영화를 봐도 전부 현정권과 자꾸 연결지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castello 2008/07/02 16:30

    폭력의 역사도 그렇게 늦게 개봉하더니만... 이거 왜 극장에 안 걸어주는지 모르겠어요. 크로넨버그가 이렇게 찬밥 취급 당하는 나라도 드물 거에요. 저도 혹시나 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기다린 김에 좀 더 기다려야 하려나요. 아님 그냥 디비디로 봐야 하려나요. 이거 참 갈등이네요. (비고 모텐슨이 활약하는 장면은 이미 찔끔찔끔 찾아봤지만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02 22:14

      조금이라도 더운 밥 대접을 받으려고 더 좋은 타이밍을 살피고 있는 듯 해요. 단순히 여름 블럭버스터들을 피하기 보다는 감독이나 배우들과 관련해서 뭔가 화제 거리가 있을 때 같이 개봉하는 것이 낫겠죠. 영화제에서 상이라도 탔으면 바로 개봉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워낙 '장르 영화'라 어디서 상 받기는 힘들었겠더군요. 굳이 꼽아보자면 비고 모텐슨이 연기상을 받을 수 있는 정도? ^^;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kaverin 2008/07/03 01:12

    엑시스텐즈 이후로 크로넨버그 영화는 오랜만에 접하네요(폭력의 역사는 보질 못해서;;)~~~그의 영화는 엑시스텐즈도 좋았지만 역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M버터플라이 였던듯.....^^;; 정말 이스턴 프라미시스가 조만간 극장개봉을 하게 될까나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7/03 08:00

      흐흐흐 역시 카베린님은 <M. 버터플라이>를 꼽으시는군요. ^^; <이스턴 프라미시스>의 국내 상영 여부는 현재로선 전혀 알 수가 없네요. 이러다가 그냥 DVD 직출시가 될지도 모르겠고요.

  5.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배트맨 2008/12/14 01:42

    아주 맛있는 곶감을 미리 빼드셨네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그러셨어요. ^^)
    리뷰 날짜를 보니 트랙백을 안보내주셨으면 저는 찾지도 못할뻔 했습니다.

    상영관을 나서면서 수작을 보았다는 느낌에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개인적으로 대중적이지는 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의 만족스러웠던 완성도와는 별개로 북미에서 - 와이드 릴리즈되었음에도 - 참패한 결과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주에 바로 교차 상영으로 돌고 있던데, 수입사나 관객 탓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많이 고민하면서 수입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영화는 정말 참 좋았습니다. 극장의 로비는 정말 많이 붐비던데, 제가 들어간 상영관은 텅 비어있더군요. 뭐 예상했던 바지만, 이렇게 개봉이 되고 상영관에서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12/14 11:02

      빼먹은지가 너무 오래된 곶감이라 뭐 거들만한 얘깃거리도 생각이 안나는 작품이 되어버렸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봐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이야기 구조와 결말을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내용상 모호한 부분이 전혀 없잖습니까 ㅋ) 표현 수위에 있어서는 역시나 아주 대중적이기는 힘들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스토리나 연출에 있어서나 배우들의 연기에 있어서나 굉장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