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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STORY 2007 우수블로그
2008/06/30 08:00
   ★★★★☆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2007년작 <이스턴 프라미시스>를 DVD로 봤습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아껴두고 있던 곶감을 드디어 빼먹은 셈인데요, 그 맛과 향이 아주 기가 막힌 작품이네요. 이런 웰메이드 장르 영화가 아무런 기약 없이 국내 미개봉 상태라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출연 배우들의 면면도 굉장히 훌륭한 편인데 말이죠. 감독의 전작 <폭력의 역사>(2005)에 비해서도 <이스턴 프라미시스>는 좀 더 전통적인 장르물의 내러티브와 구성 요소들을 고루 갖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 영화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인데 해외 영화제에서 아무런 수상 이력도 없고 해서 아직까지 수입조차 안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영화는 DVD 직출시 보다는 차라리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극장 개봉 시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999년작 <엑시스텐즈> 이후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파이더>(2002)는 패트릭 맥그래스가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고 <폭력의 역사>는 존 와그너와 빈스 로크의 그래픽 노블을 조쉬 올슨이 각색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스턴 프라미시스>는 영국 출신 작가인 스티븐 나이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작품이고요. 어찌 보면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점을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면도 있지만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한 장인의 솜씨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4세 소녀의 출산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일기장을 시작으로 런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들의 치부를 파헤치는 범죄 드라마입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가 마피아 집단을 내부 시각에서 다룬 작품이었다면 <이스턴 프라미시스>는 그들의 몰인간성을 외곽으로부터 통렬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스턴 프라미시스>는 14세 소녀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가족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의 정체 등에 관한 의문들을 붙들고 진행되는 스릴러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연출은 서스펜스의 창출 보다는 극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긴 니콜라이가 함정에 빠져 목욕탕에서 체첸계 암살자들과 맨 몸으로 혈투를 벌이는 장면은 영화 속 유일한 액션 장면이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 그대로 대단한 개싸움을 펼쳐 보입니다. 그에 앞서 니콜라이가 런던의 러시아 마피아 보스들 앞에서 입단 신고를 하며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그들 조직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씨퀀스라고 생각됩니다. 어린 소녀가 남긴 간난 아이의 미래에 대해 "노예가 노예를 낳을 것일 뿐"이라고 내뱉는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극악한 면모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약자들의 삶을 그런 식으로 짓밟는 자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스턴 프라미시스>의 결말은 비교적 낙관적인 편입니다. 대놓고 권선징악의 순진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세대가 바뀌면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드러낸다고 할까요. <이스턴 프라미시스>를 대중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근거도 다수 관객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영화의 낙관적인 결말 때문입니다. <폭력의 역사>에서 순진남의 외양 속에 치명적인 폭력의 개인사를 품고 있었던 비고 모텐슨이 <이스턴 프라미시스>에서는 그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중심에 서고 벵상 까셀과 나오미 왓츠도 비극의 악순환을 중단시키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우린 애들은 해치지 않아." 유모차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우리나라 시위 진압 경찰들 보다는 러시아 마피아들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주변 인물들 가운데 파키스탄계 이발사 부자가 등장하는데요, 약간 덜 떨어진 17살짜리 아들이 아스널의 팬으로 나오더군요. 첼시와의 경기 티켓을 구했다고 좋아라 하다가 경기 당일 거리를 행진하는 첼시 팬들의 틈에 끼어서 홀로 아스널을 응원하는 모습이 불안 불안하더니 묘지에서 오줌을 누다가 체첸계 암살자들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검은 가죽옷의 체첸계 암살자들은 그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산에서 막 내려온 늑대" 같다고 합니다. <넘버 3>(1997)에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던 송강호와 불사파 꼬붕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Eastern Promises (2007) directed by David Cronenberg official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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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주성치 | 2008/06/30 09: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우나 격투씬은 정말 최고의 맞짱씬이라고 생각합니다.
BlogIcon 신어지 | 2008/06/30 12:36 | PERMALINK | EDIT/DEL
좀 다르긴 하지만 <똥개>에서 정우성의 감방 맞짱씬이 생각나더군요.
비고 모텐슨의 열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BlogIcon 필그레이 | 2008/06/30 11: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우- 굉장히 재밌을 것 같네요.중간중간 씬들 설명에도 볼만한 장면들이 급 눈에 선해지는 것이...볼 수 있는 방법을 좀 찾아봐야겠어요.안그래도 영화를 요즘 도통 못봤더니...더더욱 보고싶은 영화가 줄어드는 것이 씁쓸했거든요.
BlogIcon 신어지 | 2008/06/30 12:39 | PERMALINK | EDIT/DEL
조금 기다리셨다가 극장 개봉 시에 보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DVD 직출시도 아니고 수입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걸 보면 직배사에서 개봉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거든요. 사실 요즘은 영화 보다 현실이 훨씬 스펙타클하죠. 영화를 봐도 전부 현정권과 자꾸 연결지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BlogIcon castello | 2008/07/02 16:30 | PERMALINK | EDIT/DEL | REPLY
폭력의 역사도 그렇게 늦게 개봉하더니만... 이거 왜 극장에 안 걸어주는지 모르겠어요. 크로넨버그가 이렇게 찬밥 취급 당하는 나라도 드물 거에요. 저도 혹시나 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기다린 김에 좀 더 기다려야 하려나요. 아님 그냥 디비디로 봐야 하려나요. 이거 참 갈등이네요. (비고 모텐슨이 활약하는 장면은 이미 찔끔찔끔 찾아봤지만요.)
BlogIcon 신어지 | 2008/07/02 22:14 | PERMALINK | EDIT/DEL
조금이라도 더운 밥 대접을 받으려고 더 좋은 타이밍을 살피고 있는 듯 해요. 단순히 여름 블럭버스터들을 피하기 보다는 감독이나 배우들과 관련해서 뭔가 화제 거리가 있을 때 같이 개봉하는 것이 낫겠죠. 영화제에서 상이라도 탔으면 바로 개봉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워낙 '장르 영화'라 어디서 상 받기는 힘들었겠더군요. 굳이 꼽아보자면 비고 모텐슨이 연기상을 받을 수 있는 정도? ^^;
BlogIcon kaverin | 2008/07/03 01:1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엑시스텐즈 이후로 크로넨버그 영화는 오랜만에 접하네요(폭력의 역사는 보질 못해서;;)~~~그의 영화는 엑시스텐즈도 좋았지만 역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M버터플라이 였던듯.....^^;; 정말 이스턴 프라미시스가 조만간 극장개봉을 하게 될까나요?
BlogIcon 신어지 | 2008/07/03 08:00 | PERMALINK | EDIT/DEL
흐흐흐 역시 카베린님은 <M. 버터플라이>를 꼽으시는군요. ^^; <이스턴 프라미시스>의 국내 상영 여부는 현재로선 전혀 알 수가 없네요. 이러다가 그냥 DVD 직출시가 될지도 모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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