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1 09:18
Christian Charles Philip Bale @ UK / 1974 ~
1974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하면 서른 다섯인가요. 오는 8월 국내 개봉을 앞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두번째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와 현재 촬영 중인 <터미네이터> 최종회의 주연 배우인 크리스찬 베일은 배우로서의 경력에 있어 정점에 오른 듯 합니다. 헐리웃의 액션 블럭버스터에서 주연을 맡아 예전보다 유명해지고 개런티도 많이 받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연기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크리스찬 베일은 연기를 단순히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데에 성공한 몇 명 안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배우들을 연기 못하는 배우들과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면 크리스찬 베일은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두 부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예 차원의 배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3살에 처음 TV 드라마에 출연했으니 그게 벌써 20년 전이네요. 크리스찬 베일의 첫 장편영화 데뷔작은 놀랍게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87년작 <태양의 제국>이었습니다. 아니, 그 꼬마가 크리스찬 베일이었어? 네, 그랬다는군요. <태양의 제국>은 무슨 전쟁통에서 꼬마애가 죽을 고생을 하는 영화라는 것 외에는 이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되었는데요, 아무튼 크리스찬 베일은 이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에서부터 일약 주연배우으로 발탁되어 맹활약을 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께서 어린 소년 배우의 연기를 충실하게 잘 지도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첫 영화 데뷔를 전쟁 블럭버스터에서의 주연으로 시작했던 크리스찬 베일은 이후로도 대부분의 영화에서 단독 주연이나 그에 못지 않은 굵직한 배역들을 맡아 연기했습니다. 92년작 <뉴스보이>(Newsies)를 시작으로 <반항의 춤>(Swing Kids, 1993),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94) 등의 작품에 출연했고 96년에는 제인 캠피온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의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에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크리스찬 베일의 영화 속 모습이 인상적으로 기억될 수 있게끔 해준 첫번째 중요 출연작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98년작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함께 출연한 이완 맥그리거와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압도적인 이미지에 가릴 수 밖에 없었지만 작품 자체가 워낙에 지속적으로 언급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인 만큼 크리스찬 베일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벨벳 골드마인>은 중요한 분기점 역할을 해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찬 베일이 만약 이완 맥그리거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했던 역할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좀 다른 이미지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좀 더 빠른 유명세를 탈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젊은 배우에게는 그 자신이 하루속히 유명해는 일 보다는 다소 비중이 낮은 배역을 맡게 되더라도 정말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좋은 작품에 참여해두는 일이 훨씬 더 요긴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리 해론 감독의 18금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American Psycho, 2000)를 빼먹을 수가 없겠죠. 91년에 출간된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워낙에 비호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잔혹 풍자극에 가까웠기 때문에 크리스찬 베일의 경력에 당장의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했지만 작품과 캐릭터 자체가 관객들로부터 폭넓게 받아들여지지를 못했기 때문에 나름 심기일전의 자세로 임했던 크리스찬 베일의 노력도 그만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기점으로 크리스찬 베일은 이전까지 알려졌던 유약한 청년의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 던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크리스찬 베일이 출연한 굵직한 화제작들은 많았지만 흥행이나 비평 면에서 거둔 성과는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어쩌면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배우 자체가 그리 대중적인 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브래드 피트 같은 경우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의 단역 한 방으로 전세계적인 주목을 끌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비하면 크리스찬 베일은 노력에 비해 대중적으로 그리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배우로 상당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출연했던 영화들도 하나 같이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퀼리브리엄>(2002)은 크리스찬 베일의 딱딱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SF 액션 활극이었는데요, 일부 관객들은 <매트릭스>(1999) 보다도 낫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극장 상영에서는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해에 먼저 만들어졌던 블럭버스터 <레인 오브 파이어>(2002)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이 시기에 형성된 우울한 액션 영웅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에서의 브루스 웨인 역할이 크리스찬 베일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는 크리스찬 베일의 출연작 중에는 대중적인 취향의 멜러 드라마가 전혀 없다는 점도 유념해둘만 합니다.
<배트맨 비긴즈>가 개봉하기 전인 2004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크리스찬 베일 영화가 한 편 있는데, 영어 대사로 진행되는 브랫 앤더슨 감독의 스페인 영화 <머시니스트>(El Maquinista)입니다. 작품 자체는 너무 도덕적인 결말의 스릴러라서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었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크리스찬 베일을 보면 배우로서 영화 속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어디까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된 유태인들의 모습 만큼이나 처참하게 마른 그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직업이 배우라지만 과연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를 본 이후로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완전히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적당히 하는 배우가 아니구나, 연기에 거의 목숨을 걸었구나 싶더군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5년작 <배트맨 비긴즈>는 크리스찬 베일이 지난 몇 년간 구축해온 심각한 이미지와 <머시니스트>에서 보여준 진지한 배우로서의 노력이 드디어 하나로 합쳐져 결실을 맺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배트맨 비긴즈> 이후 전형적인 스타 배우로서의 활동으로 전향해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레스티지>(The Prestige, 2006)나 <3:10 투 유마>(3:10 To Yuma, 2007)와 같은 적당히 대중적인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레스큐 던>(Rescue Dawn, 2006)이나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 2007)와 같은 작품들에도 기꺼이 함께 하는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아임 낫 데어>에서의 연기는 이제껏 보여준 크리스찬 베일의 모습과는 그 깊이가 또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제가 이렇게 크리스찬 베일 트리뷰트 포스팅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부터 열심히 좋아라 해왔던 배우도 아니고(송곳니와 혀 짧은 발음이 항상 걸리더라고요) 출연작들이 전부 고르게 훌륭했던 것도 아닙니다만 최근에 크리스찬 베일 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겨주고 있는 배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도 다른 스타급 배우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군요. 8월에 개봉하게 될 <다크 나이트>는 故 히스 레저의 유작일 뿐만 아니라 그가 연기했던 새로운 조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작품이었는데 최근 들어 주연인 크리스찬 베일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마저 품게 되었으니 도저히 안볼 수가 없는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배우들이 다들 크리스찬 베일 만큼 해야 한다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찬 베일은 다른 배우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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