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게 어디 미국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자본이 가족의 가치를 내세우고 세속 종교가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준다며 시커먼 탐욕의 불기둥을 쌍으로 뿜어 올리는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기도 하지 않던가요.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가 없는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처럼 광기에 가까운 승부욕으로 성공을 일궈낸 수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권과 내각이 바뀌고 때마침 많은 회사들이 주주총회를 여는 시기에 영화를 본 탓도 있었겠고요. 미국이라는 국가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들을 통해, 그리고 실존 인물들을 통해 보아온 캐릭터의 기시감이 상당했습니다. 그런 면모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 자신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한 속죄양이 되어 흘리셨다는 보혈(Blood)이 아니고서는 그 굴레를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천상 죄인인 것이죠.

정치가 아닌 종교가 자본과의 대립각을 세운다는 점 외에는 전체적으로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율이 참 잘된 영화더군요. 엔딩 크리딧에서 영화를 로버트 알트만 감독에게 헌정하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시종일관 팍팍 느껴진다고 할까요. 미국 대자본의 탄생을 상징하는 유전탑의 모습과 굴착기의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참 무시무시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더군요. 영화를 몇 년에 한 편씩 밖에 찍지 않는 배우이기 때문에 그의 연기를 새 영화에서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진기명기를 감상하는 일과 다름이 없지 싶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에서 처음 봤을 때 저런 외모로 인기 배우가 되기는 어렵겠다 싶었던 폴 다노는 배우란 외모가 아니라 연기를 보여주는 직업이란 평범한 사실을 재삼 확인시키며 저를 부끄럽게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키애런 하인즈의 비중이 너무 적었전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플롯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마는 안타까움이라니요.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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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아닌 죽음으로서의 피는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표 이미지가 됩니다. 은광에서, 그리고 유전에서 사고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허락된 그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메시지입니다. 미국이 피의 대가를 치르며 세워진 나라이고 부를 축적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결탁하고 자신을 건드린 자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하는 무자비함 역시 미국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된 미국 내 신매카시즘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상의 이유와 달리 석유 공급선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이라크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광기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던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들의 피가 뿌려진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대운하를 파는 과정에서도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할테지요. "I'm finished."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지만 피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그들을 위한 보혈이란 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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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7 : Comment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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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스테판 2008.03.15 20:07 신고

    이런 영화가 서울의 몇몇 극장에서만 상영된다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15 22:36 신고

      단관 시절 같았으면 분명히 명보나 대한극장에 걸려 한달 정도 롱런했을 영화인데 말이죠. 이런 영화를 외면하는 관객 취향과 배급/극장의 짝짜꿍이 아쉽지만 개인적으로는 몇 개 관에서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오만과 편견 2008.03.15 22:56 신고

    폴 다노의 연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참 좋은 영화 였습니다.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16 10:47 신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의 경합이 붙지 않았더라면
      작품상 등 주요 부문을 충분히 수상했을 영화예요. ^^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tmrw 2008.03.15 23:23 신고

    그 블러드가 그 블러드였군요.
    3시간이 지겨운줄 모르는 영화라니 대충 감이 잡히네요....
    내용도 그렇고.. 꼭 봐야할 영화같아요.

    지금 밀린영화 보러 나갈 나들이 날짜 따져보고 있어요.ㅋㅋ
    아무래도 씨네큐브에서 하루 날잡아서 살아야 할듯.ㅋㅋ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16 10:57 신고

      주님의 보혈 어쩌고 하는 대사가 중간에 있어요. 제목의 블러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대사도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 같고요. 총질하고 싸우고 하는 액션이 많은 건 아닌데 비주얼과 사운드에서 시종일관 관객들을 압도하는 영화랄까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씨네큐브에서 안하는데 중앙시네마 1관 2층에서 보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날씨도 많이 풀려서 그다지 춥지 않더군요. ㅎ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나쉬 2008.03.16 23:17 신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더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는게 필요없을 거 같고. 폴 다노의 연기도 참 놀라웠어요. 안톤 쉬거만 아니었으면 이 둘이 남우주연/조연을 셋트로 가져갔을 거 같아요. 정말 폴 다노 연기 소름끼치더군요 ㅠ.ㅠ 앞으로 더 지켜보려구요 :)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밴드도 하고 있대고, 참 다재다능하네요>.<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17 07:58 신고

      폴 다노도 그쯤 되면 거의 접신하는 연기라고 해야죠.
      저도 하비에르 바뎀 아니었으면 폴 다노에게 조연상이
      갔더라도 별 할 말이 없었겠다 싶었어요. 여러모로
      <노인>과 <블러드>는 중첩되는 부분이 많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어요.

  5.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comodo 2008.03.31 05:18 신고

    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자꾸 생각나더라구요,
    그나저나 좋은 영화들은 참 기분 좋게 만들어 줍니다 크크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3.31 07:54 신고

      두 영화 모두 대단한 작품이죠. 비슷한 시기에 연이어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한편 좀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몇 년에 한번 나올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나니 꼭 태풍 끝난 바닷가 같습니다. ㅎ

  6.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페니웨이™ 2008.04.22 13:13 신고

    확실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쌍벽을 이룰만한 엔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감독들을 두고 '천재'라고 한다지요... 올해는 과연 어떤 작품이 이 정도의 포스를 발휘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04.22 13:59 신고

      굉장한 작품 두 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막강한 포스를 내뿜어주셨죠. ㅎㅎ 영화 시작할 때 두 영화 모두 파라마운트 밴티지 제공으로 소개되더군요. 아마 파라마운트 산하 독립영화 부문이거나 배급사인듯 했어요.

  7.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allak 2009.02.03 02:08 신고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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