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5년 전 일이네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을 보고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이런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더군요. 시들해지던 영화 보기의 즐거움을 단박에 되찾았더랬습니다. 며칠 후 같은 직장에서 가깝게 지내던 선배 하나와 '요즘 재미있는 일, 볼만한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보세요. 박찬욱 감독 껀데요... 선배가 고개를 내젓더군요. "나 살아가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드는데 극장 안에서까지 그런 거 보고 싶지가 않다"는 거였습니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주는 현실적인 의미나 역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끔 해준 계기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우주와 역사의 비밀을 풀거나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일도 좋지만, 골치아픈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일도 무시해서는 안될 몫이라는 겁니다.
<검은 땅의 소녀와>도 아마 그 선배에게는 '극장에서까지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영화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유명한 스타 배우가 나오지 않고 흥미진진한 이야깃 거리나 볼 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나서, 지치고 바쁜 삶을 살며 애써 잊고 살았던 저 어두운 한 구석을 들춰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물샘을 자극하여 카타르시스의 기회라도 제공하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잡지에서 '너무 영화제용'이라는 단평을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섣부른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 영화입니다.1) 어쩌면 1004ant님 말씀처럼 '바쁜 생활에 찌들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미안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또 한편의 독립영화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검은 땅의 소녀와>는 미안한 감정 정도가 아니라 일말의 죄책감까지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폐광촌입니다. 폐광촌을 배경으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영화들2)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검은 땅의 소녀와>에서 그곳은 말 그대로 버려진 곳일 뿐입니다. 따로 흑백 필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방은 검은 땅이고 흰 것이라곤 겨우내 쌓인 눈이거나 인적 없는 회색 건물들 뿐입니다. 정기 검진에서 진폐증이 발견된 홀아비 최해곤(조영진)은 합병증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금도 받지 못한 채 퇴직 조치를 당합니다. 이후로 영화는 최해곤의 인생이 추락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데에 할애됩니다. 마땅한 자격증도 없어 직장을 새로 구할 수도 없었지만, 대신 트럭을 임대해 생선 장사에 나섭니다. 그러나 동구와 영림 남매를 차에 태우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는 일도 잠시, 정신지체가 있는 동구(박현우)의 실수로 외지인의 비싼 수입차를 들이받고 남아있던 가산을 탕진합니다. 의지를 상실한 최해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차주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뭇매를 맞고 집 안에 드러누워 술로 남은 생을 보내는 것 뿐입니다.
이제 바톤은 오빠의 누나 노릇까지 해내던 영림(유연미)에게로 넘어갑니다. 영림이가 주도하는 영화의 남은 부분은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지만 최해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내러티브의 진부함을 단박에 뒤집습니다. 소주 한 병과 라면 세 봉지를 위해 도둑질을 해야만 하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영림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갑니다. 버스 정류장에 선 영림이의 마지막 모습은 장 률 감독의 <망종>(2005)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드센 힘으로 관객들의 눈과 가슴을 후벼팝니다. 영화 전체가 이 한 컷을 위한 긴 설명문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떠한 미학적 견해도 그 앞에선 사치스러운 수사가 될 뿐입니다. <검은 땅의 소녀와>가 원했던 건 관객들 앞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던지는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가 아니라, 이제 당신이라면 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는 질문 말입니다. 검은 땅의 그 소녀에게 그저 미안한 정도가 아니라 심한 죄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1) <검은 땅의 소녀와>가 실제로 베니스영화제와 부산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작품이긴 합니다만, '영화제용 영화'라는 게 정확히 어떤 부분을 지적한 표현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바흐만 고바디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처럼 어린 아이들을 내세웠다는 건지 아니면 서사 구조나 표현 방식에서 다른 영화제 수상작들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건지. '영화제용 영화'라고 하길래 삶의 당면한 문제를 넘어 뭔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검은 땅의 소녀와>는 검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있는 영화였습니다.
2) 폐광촌 하면 가장 먼저 <빌리 엘리어트>(2000)가 생각나고 비슷한 내용의 일본 영화 <훌라걸스>(2006)도 있었습니다. <브래스드 오프>(1996)도 영국의 탄광촌 사람들 이야기였구요 탄광촌은 아니었지만 제철소의 실직자들 역시 <풀 몬티>(1997)에서는 삶의 희망을 불태웁니다. 나름대로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위로 또는 격려를 제공하고자 하는 '기본 기능에 충실한' 영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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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어쩌다 소녀가 결정해야 했나? - 검은 땅의 소녀와 (2007)
2007/12/23 12:36 tracked from 1004ant의 한일영화 이야기전수일 감독의 소녀 시리즈 3부작중... 1부작.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평소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든 경계란 영화....를 보고 리뷰를 적은 적이 있는데, 리퍼러를 통해 들어오는 것 중 신어지님의 블로그가 있어서.. 역추적해보니... 내가 경계를 보고 느낀 감정을... 신어지님은 검은땅의 소녀와를 보고 많이 느끼신 모양이였다. 그때 그렇게 지나가고, 너무 예술영화같아 ... 속으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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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이 인용되기도 하니... 기쁨이 일어난 이후 ... 약간 무서워지기로 하네요... ^^
제목이 (2007) 앞인지 뒤인지 헷갈려요~
제가 이걸 쓰던 중에 1004ant님 글을 읽었는데, 무슨 텔레파시가 통했나 싶었답니다. 독립영화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얘기하고자 했던 측면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해주셔서 '인용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만. ^^;
참 특이한 제목이죠. 굳이 소녀'와'(with)라고 제목을 정한 이유도 영화의 제작 의도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영화를 보며 꿈과즐거움을 찾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보게 될 것 같진 않네요. 하하핫;;;;;그래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좋던데....^^;;
아마 말씀하신 평론가는 이 영화가 아무런 대중을 끌 만한 요소 없이 영림의 가족이 추락해가는 과정을 차근히 보여주는 영화기 때문에 그렇게 평한 게 아닌가 싶긴 하네요. 아님 말고....ㅡ.ㅡ;;
누구나 꿈과 즐거움을 발견했던 일로 영화와 처음 만났다는 걸 기억한다면 영화가 하는 그런 일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거예요.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서, 사회에 대해 무언가 발언하는 매체로서의 영화도 물론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요.
<복수는 나의 것>을 말씀하시며 오랜만에 느끼셨던 한국영화 보는 즐거움을 말씀하시니
얼른 눈을 찔끔 감아 버렸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엔 관련글을 읽지 않아서요.
대신 저도 말씀하신 한국영화 보는 즐거움에 들떠져서 영화가 기대가 많이 되네요^^
꼭 챙겨보겠습니다!
저도 영화 보기 전엔 리뷰나 감독 인터뷰 등을 가급적 읽지 않아요. 리뷰는 어디까지나 후일담을 나누는 것이라고나. 나중에 <복수는 나의 것> 보시고 다시 오셔서 천천히 읽어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이긴 하지만 가장 잘 만들어진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ㅎㅎ<복수는 나의 것>은 이미 봤지요. 너무 많이 봤지요.
외국영화, 한국영화 통털어서도 제가 손꼽는 영화랍니다.
제가 눈을 감은 이유는 <검은땅의 소녀와>를 보기위함이랍니다.^^
아항 그 말씀이셨군요. 그럼 그렇죠. ^^;;
근데 <검은 땅의 소녀와>와 <복수는 나의 것>을
직접적으로 비교한 건 아니었구요. 이런 저런 이유로
<복수는 나의 것>과 관련된 개인적인 일화가 떠올랐더라,
뭐 그런 정도의 얘기였습니다.
<검은 땅의 소녀와>이 이제는 상영관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잘 찾아보시고 소식 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