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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 가운데 밑그림만 인쇄되어 있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각 장에는 검은 실선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이들 스스로가 색연필이나 크레용으로 빈칸을 색칠하는 놀이책이죠. 같은 책을 주더라도 아이들의 취향과 그리기 실력에 따라 각양각색의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겠죠. <페이지 터너>는 관객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빈칸을 채워야 하는 밑그림책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와 플롯 구성부터가 상당히 단순한 편입니다. 음악학교에 입학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멜라니(데보라 프랑수아)는 심사위원이었던 유명 피아니스트 아리안(캐서린 프로트)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주위를 산만하게 만든 탓에 시험에 떨어지고 꿈을 포기하게 됩니다. 10년 후 멜라니는 아리안의 남편이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기회를 잡은 뒤, 방학 동안 그들의 어린 아들을 돌봐주기로 하면서 아리안의 집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시절 자기 꿈을 망쳐놓았던 일에 대해 잔혹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잔혹한 복수극이라고 해서 주인공들이 총칼을 들고 피칠갑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게 아닙니다. 영화는 중심 인물들의 동기나 심리 묘사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습니다. 알듯 모를듯한 표정들과 다소곳한 움직임들을 바라보다가 간간히 제시되는 미니멀한 배경 음악을 통해 약간의 서스펜스를 인지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페이지 터너>가 한 권의 밑그림 책이라고 한다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윤곽선들은 데보라의 치명적인 젊음과 그 앞에 풍전등화 처럼 연약하기만 한 중년 여인(아리안)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들은 그램책의 각 장을 묶어주는 스프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일반적인 장르 영화들과 달리 일일히 설명하려들지를 않는 데다가 내러티브 또한 이리저리 비트는 일 없이 단번에 내리치듯 끝맺는 영화입니다. 러닝타임도 84분에 불과하지만 소품이라거나 불친절한 영화라고만 하기에는 만듬새가 너무 뛰어납니다. 자칫 밋밋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유럽 영화 특유의 간결한 맛을 느끼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페이지 터너>의 디테일에 색을 덧입히고 꼼꼼히 완성하는 일은 관객 각자가 완성해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더 차일드>(2005)에서 어린 미혼모로 데뷔했던 데보라 프랑수아가 정중동의 연기력과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ps. 아리안의 남편 역을 연기한 파스칼 그레고리를 어디서 봤었더라 했더니 <여왕 마고>(1994)와 <잔다르크>(1999)에 출연했었네요. 아, 개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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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 Cinerge: 영화 딴 맛 느끼기

    FROM 블로그코리아 공식블로그 2007/10/18 16:54  삭제

    <?xml:namespace prefix = o /> 산마르크 광장에 혼자 섰을 때 느껴야 하는 그 서글픔 대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작은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그 이야기를 인터넷 상에서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을 하고 싶어서 '딴 맛' 블로그를 시작했다는.. Different Tastes™ Ltd. 의 '신어지'님을 소개합니다. 산마르크 광장에 혼자 섰을 때 느껴야 하는 그 서글픔 대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작은 영화보기의 즐거움..

  2. 스푸트니크의 인연, 블코인터뷰

    FROM 타인에게 말걸기 2007/10/18 16:56  삭제

    블로그코리아 이번 인터뷰 때문에 신어지님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됐어요. 벌써 2~3주 전 일이네요. 신어지님 너무 늦게 리뷰 올렸어요.^^ 블로고스피어에서의 인연은 참 오묘한 매력을 주는데요. 뭐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잠시빌려, 자신의 궤도를 가지는 무수한 행성들이 우연히 마주치고 그것이 잠시 인연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도 모르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알아가는 그 느낌 참 좋아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 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3. 페이지 터너(2006) - ★★★

    FROM 靑春 2007/10/19 10:03  삭제

    색다른 스릴러를 원하는 분이 있다면 일단 이 영화를 추천한다. 마치 '올드보이'가 떠오를 정도의 플롯을 가지고 있으나, 어떤 긴장감이나 박진감 없이 그야말로 정적으로 그려진 스릴러(?) 영화다. 때문에 어떤 분들은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가늘지만 아주 팽팽하게 연결되어있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딱히 놀랄만하나 반전이나 공포스런 상황이 아니어도 왠지모르게 긴장이 되어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나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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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투모로우 2007/10/11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에 "아 개운해.."ㅋㅋㅋㅋ 그 느낌 뭔지 알거같아요.

    피칠갑 없으니 저두 봐도 될까요. 신체훼손 없음 되는데..
    어떤식으로 복수를 하는지 진짜 궁금하군요. 지금 개봉한 영화인가요??

    • BlogIcon Cinerge 2007/10/12 0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피가 쪼금 보이긴 하는데 피칠갑이나 칼부림 액션 없습니다. 신체훼손 약간 있긴 하지만 그런 광경을 전시하거나 하지도 않구요. 복수의 플롯은 어느 정도 예견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꽤 성공적이라고 할 있구요 무엇보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통쾌하다는 식으로 전달하지는 않고 있어요. 그리하여 주인공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조차도 관객의 몫으로 남겨주는 영화랍니다. 지난 주 개봉한 영화인데 이번 주말과 다음주 초까지는 무난히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프랑스 여행을 가서 프랑스 식당을 갔는데 메뉴에 햄버거 밖에 없으면 아무리 맛이 있어도 좀 실망스럽겠죠. 프랑스 영화에서 프랑스의 맛을 볼 수 있어서 저는 참 좋았어요. ^^

  2. BlogIcon 페니웨이™ 2007/10/12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보셨군요. 스포일러 있을까봐 본문은 읽지 않았습니다만 이번주에 꼭 보러 갈겁니다^^

  3. BlogIcon reme19 2007/10/13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수아 오종 영화의 소프트 버전인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여인의 관계가 단지 복수의 끈으로만으로는 묶을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라는 점이 꽤 흥미롭더군요.^^

    • BlogIcon Cinerge 2007/10/13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프랑수아 오종의 소프트 버전! 정말 적절한 표현이시네요.
      스포일러일 수도 있지만, 사실 두 여인 간의 관계와 복잡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이 영화의 플롯과 정서 양면에서의 앙꼬라고 할 수 있죠.
      복수를 하러 들어간 여인의 타겟은 보통 남성인 경우가 많고 그리하여
      치정극으로 발전하기 쉬운데 <페이지 터너>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독특한 내러티브였어요. ^^

  4. BlogIcon smirea 2007/10/18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랙백 걸었습니다. 신어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