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투자자들은 어떤 감독을 가장 좋아할까요? 물론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흥행 제조기 감독이겠죠. 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자기 브랜드를 가진 감독들도 좋아합니다. 아무튼 투자자에겐 Show me the money 해주는 감독이 최고입니다. 그럼 제작사는 어떤 감독을 좋아할까요? 제작사도 물론 흥행이 잘되고 작품성도 인정받을 수 있는 영화를 원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란 정해진 예산과 기간 내에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제작사가 좋아하는 감독은 다름아닌 '납기를 준수하는' 감독입니다.1) 어차피 한 두 편 만들고 장사 그만둘거 아니라면, 그리고 열 편 망해도 한 편의 대박 영화로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게 영화 사업이라면 최종 결과물이 죽이되든 밥이되든 애초에 계획했던 일정 내에 마무리를 해줘야 다른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영화 감독이라는 위치는 단위 작품의 크리에이티브를 총괄하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예산과 납기 준수'라는 제작사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합니다.2) 이준익 감독은 기본적으로 현실 감각이 뛰어난 영화 감독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영화의 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대중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제작사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척척 만들어내는 일에 집중하는 장인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키드 캅>과 <황산벌>이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했음에도 세번째 장편 <왕의 남자>를 바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준익 감독은 투자자들도 그의 이름만 보고도 바로 사인을 해줄 수 있는 소위 '스타 감독'의 위치에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어떤 감독은 10개를 담을 수 있는 영화라는 그릇에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15개를 전부 담고자 합니다. 제대로 담기가 몹시 어려워서 결국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기가 쉽고, 설령 15개를 모두 담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일부 관객들을 제외하고는 영화에 담겨있는 15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관객이 많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불운한 걸작'이라고 하죠. 한국영화 역대 흥행 상위권의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7 ~ 8개 정도만 담겨진 영화들입니다.3) 그러나 좀 허전하다 싶었던 영화가 의외로 초대박을 내곤 합니다. 10개 또는 그보다 더 많이 담겨져 있으면서 다수 관객들의 호응도 크게 얻었던 작품은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 정도였습니다. 반면 천만 관객 동원의 <왕의 남자>는 그릇 안에 7 ~ 8개를 담는 데에 그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인생>은 <왕의 남자>와 비교에서도 1 ~ 2개 정도가 더 모자른 영화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담았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담았느냐 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80년대 헐리웃 영화의 장르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르 영화를 공격하는데 자주 쓰이는 구절들을 갖다 대면 대부분 옳은 소리가 됩니다. <즐거운 인생>의 경우는 예를 들어, 허다한 음악 영화들의 대표 컨벤션 가운데 하나인 '주인공과 사이가 틀어졌던 가족이나 애인이 마지막 연주회 장면에 찾아온다'를 아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 쓴 영화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장르물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묘법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존 영화들의 레퍼런스가 그리 많지 않은 새로운 관객들과 '너무 꽉 조이는 겨울 내복 보다는 여름용 모시 메리' 같은 영화를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래그래 맞아맞아 하는 공감 유도형 에피소드들과 배우들의 맛깔 나는 연기, 그리고 영화 전체에 힘을 주기 보다는 중요한 몇 군데에서 확실하게 터뜨려주는4) 이준익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잘 살아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의 대중영화로서의 <즐거운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밴드의 연주 장면을 좀 더 다이나믹하게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해외 유명 그룹들의 공연 실황들을 보면 극 영화와 다른 고유한 카메라 워크나 각도가 따로 있거든요. 음악평론가 출신인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올모스트 훼이모스>를 보면 70년대 록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정말 현장에 있는 것 처럼 되살린 멋진 장면이 초반에 나옵니다.5) 그외 대부분 음악 영화들을 봐도 영화 전체는 다소 처질지언정 연주 장면에서 만큼은 확실한 임펙트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즐거운 인생>에서의 연주 장면, 특히 가장 큰 임펙트를 줘야했을 마지막 연주 장면은 다른 장면들과 그다지 큰 차이없이 다소 밋밋했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실컷 다이나믹한 촬영을 해놓고선 편집 과정에서 그냥 촌스럽게 가자고 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6)
마지막으로 <왕의 남자> 이후 두 편의 후속작으로 발빠른 행보를 보여준 이준익 감독에게 주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영화의 외양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해 좀 더 고민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당신의 영화가 TV 드라마들과 다른 점이 뭐냐고 물었을 때 "TV에는 안나오는 정진영이랑 배우들이 나온다"고 한다면 이준익 감독은 단지 전반적인 영화 제작 역량이 높아진 환경의 혜택을 받아 프렌차이즈 멀티플렉스 시대의 행운아였던 감독으로 밖에 기억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이준익 감독이 그 이상의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TV가 보여주지 못하는 그 무엇을 잘 고르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는 표현 방식도 기존과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기타 잡담들>
1) 촬영 도중에 예산을 초과해서 제작사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영화 감독에게 있어 더더욱 피해야 할 일이죠. 이런 경우 가끔 강짜를 부려서 위대한 걸작을 만드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대재앙으로 끝맺는 일이 더 많습니다.
어느 정도의 관객 인지도를 갖게된 감독들은 이와 같은 투자/제작사들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 제작사를 차리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 홍상수 감독의 진인사, 류승완 감독의 외유내강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는 멜 깁슨과 토니 스코트 감독 등이 자기 제작사를 차리고 영화를 만들고 있죠. 투자와 캐스팅만 확보할 수 있다면 작품의 선택권이나 그외의 영역에서의 전권을 행사하는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2) 오래전 미국과 일본에서는 영화 감독들이 아예 스튜디오 내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고 활동하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오스 야스지로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도 스튜디오 소속 연출가 출신이었죠. 이것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스튜디오 시대라는 것이고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이 '독립 영화'의 원래 의미였습니다. 요즘은 '독립 영화'라고 하면 그냥 저예산 영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곤 하죠.
3) 물론 저의 매우 주관적이고 모호한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심지어 단 1 ~ 2개만 가지고도 10위 안에 신규 진입한 영화가 나오기도 했죠. 어떤 관객 분들은 그 영화의 1 ~ 2개만으로도 그릇이 가득찬 느낌이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소문이 무성해서 보러왔더니 1 ~ 2개가 전부더라며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아예 '영화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4) 연습장에서 '불놀이야'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그 장면의 컨텍스트와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찌릿찌릿하고 안구에는 쓰나미가 몰려옵니다. 앞으로 당분간 제 노래방 18번은 불놀이야 입니다.
5) 빌리 쿠드럽의 리드 기타에 제이슨 리가 보컬을 맡은 '스틸워터'라는 영화 속의 밴드였는데 레드 제플린 스타일의 음악에 딥 퍼플의 외양(특히 전성기 시절의 보컬이었던 이안 길런)을 차용한 것 같더군요. Fever Dog이라는 곡이었는데 주인공 소년의 동경하는 시선을 반영한 정말 근사한 장면이었습니다.
6) 그런 면에서 <즐거운 인생>은 제목처럼 음악 영화라기 보다는 인생 드라마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진짜 음악 영화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면 콘서트 연주 장면만 다른 연출자에게 맡기는 방법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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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즐거운 인생 (2007)
2007/09/27 22:19 tracked from xenomorph's nest*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언젠가 라디오 게스트로 나온 노브레인의 이성우는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이 출연한 영화 『라디오 스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는데, 그것은 “이준익 감독님은 펑크(Punk)를 훵크(Funk)로 부르시는 것만 빼면 다 좋다”는 식의 장난 섞인 말이었다. 그것이 이준익 감독의 장르의 구분에 대한 혼동인지, 단순한 발음상의 습관을 의미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이성우의 이 장난스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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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칠부, 팔부능선에서 멈춰선 ... 즐거운 인생 (2007)
2007/10/01 18:28 tracked from 1004ant의 한일영화 이야기생활 속에서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등한시 (?)한 무개념의 남자들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무개념은 그들의 아내들이였더라. 배우들의 연기을 보기에도 좀 볼만한 껀덕지가 없고, 연출도 그냥 밋밋한 영화... 배우들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영화일 수도 있겠다. 장근석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욕을 하고 싶어도 욕거리가 없는 역할이다.) 밴드 결성을 빨리 이루기 위해 정진영의 오바연기가 민망하지만, 더 민망한 것은 그 이후 드는 생각은 뭐 하러 그리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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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즐거운 인생(2007) - ★★★
2008/08/25 09:56 tracked from 제 3의 공간개봉시기에 놓치는 바람에 디비디가 출시 되길 기다렸던 영화인데, 결국 개봉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서야 디비디가 출시 되었다. 당시 흥행성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준익 감독 작품인데 왜 이리 늦어졌을까. 어쨌든 드디어 봤다, 즐거운 인생. 우선 '밴드'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니 끌렸고, '라디오스타' 덕분에 이준익 감독에 대한 기대치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밴드 '트랜스픽션'도 잠깐 출연한다고 하니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평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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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이라 좋은거 같아요. 라디오스타도 그랬구요..
이것두 편하게 웃으면서 보구싶네요..^^
편하고 웃을 수 있고 적당한 감동도 주는 영화예요. 어제 노래방에서 불놀이야를 부르면서 너무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완전히 잠겼어요. ㅋ
이 영화를 즐길 또 다른 타겟층은 바로 합주실 세대입니다. 사실 제가 이 영화를 보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 것이 더 컸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주 잘 연출된 장면이 있다면 바로 합주실 신들이거든요.
첫번째 합주에서는 모두가 들뜬 나머지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틀리는 것 외에도 맞춰가는 듯 보이는 장면들도 전부 박자가 절거나 따로 가죠. 그래도 그들은 즐거워합니다.
그러다 한번 두번 거듭되면서 호흡이 조금씩 맞춰져갑니다. 이건 합주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100% 공감할 장면들이예요. 게다가 배우들이 악기 연습을 열심히 해서인지 점차 나아지는 모습까지도 모두 포착됩니다. 연습으로 연주가 나아지는 장면을 이렇게 실감나게(연기로나 연출로나) 표현한 음악영화는 한국최초가 아닌가 싶네요.
마지막 공연 장면에선 정말 호흡이 완벽합니다. 더구나 드럼의 김상호는 중간 스틱돌리기도 보여주죠.^^ 이렇게 밴드를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관객들에게 어필할 요소가 이 영화엔 있습니다. 그게 '뻔하지만' 보편적이어서 공감되는 이야기와 보기 좋게 합쳐졌다고 봐요.
즉, 이 영화를 그저 평범한 인생영화라 볼 수도 있지만 음악영화로서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기도 하구요. 밴드가 나오는 영화엔 좀 편애가 있는 편입니다.^^;;
저도 친구따라 홍대 앞 합주실에 몇번 가본 적이 있어요. 그 장면 볼 때 어? 내가 갔던 거기 아닌가? 싶을 정도더군요. 하지만 제가 갔을 땐 사람이 꽤 많아서 분위기가 좀 달랐지만요.
저는 홍대 클럽과 마지막 공연 장면들에서... 관객들이 형광등을 들고 너무 열심히 흔들어주는게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였어요. 그리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준익 감독 저 양반이 클럽 공연을 막상 열심히 안가봤구만 했죠. ㅋㅋ 리얼리티 보다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하면 그리 흉잡을 만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밴드의 레퍼토리들이 70년대 대학가요제 곡들이었는데 그게 지금 세대에 잘 먹힌다는 부분은 충분히 수긍할만 했습니다. 저도 학생 때 기타를 좀 쳤었는데 너바나가 등장하기 전이라... 곡이 어렵고 연주도 너무 잘해야만 하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지금 같으면 편하게 연주하고 즐길 수 있는 곡들이 참 많은데 타이밍을 못맞춘 제가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해요. ^^
이준익감독 인터뷰 내용이... 키드캅 망하고 영화 제작만 하다가... 황산벌.. 찍겠다는 감독이 없어서...어쩔 수 없이 재기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김호정, 고아성... 두 배우 캐스팅은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고아성... ^^;
그래서인지 이준익 감독은 확실히 영화 작가라기 보다는 제작자 마인드가 강한 편인 것 같아요.
저도 고아성 반갑더군요. 김호정은 언제나처럼 훌륭했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