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쉬 페이션트"를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열린 관객시사회로 보았다. 일전에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보러 씨네하우스에 갔다가 30분 전이었음에도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와야했던 일을 경험삼아 이번엔 무척 일찍 가서 기다렸다. 시사회 진행도 여느 시사회에 비해 꽤 합리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 중간 들어낸 부분이 많았음에도 상영시간이 2시간 40분 정도가 되었는데, 지루한 느낌없이 재미있게 보았다. 아카데미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이런 뻔한 줄거리의 러브로망, 멜러서사극을 현재와 과거의 교차편집으로 극복해냈다. 완성도 면에서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모든 영화적 구성요소들이 완벽하게 짜맞추어진 가운데, 항상 그래왔듯이 배경음악이 아주 튄다. 설문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것은 영화 내용상 곁가지에 속하는 '줄리엣 비노쉬가 밧줄을 타고 공중에서 그림 구경을 하는 장면'이었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루브르에 숨어 들어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촛불 아래서 보는 장면을 연상케 한 이 장면은 깔끔한 사랑의 이야기를 묘사하기엔 더없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된다.

한장면만 더 꼽는다면 역시 랄프 피네스(요샌 랄프 파인스라고 하더군)가 다친 여주인공을 안고 동굴로 들어가던 장면이다. 랄프 피네스는 영화 전반에 걸쳐 소유하는 것과 소유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면서 결국 그 소유욕에 철없이 구는, 전형적인 영국식 터프가이를 너무나 잘 소화해 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주인공의 진심을 알게되자 오열하게 되는 이 장면은 조건반사적인 가슴 뭉클함을 남겨준다. 마침내 닥쳐온 위기, 여주인공의 대사, 그리고 남자의 눈물... 대책이 없다.

환호와 탄식을 내지르게 만드는 획기적인 맛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다할 결점도 찾기 힘든 영화가 "잉글리쉬 페이션트"다. 그렇다고 구태여 '아직도 여전한 서구제국주의의 어쩌고...'하면서까지 재미있게 본 영화를 난자하기도 귀찮다. 확실히 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떠들썩한 미국 군인들과 성조기가 큰 무리없이 잠깐 비치고, 미련해보이기만 하는 이들에겐 잠재의식 속의 고향이 되는 영국인 귀족들이 또다시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이번 판본에는 캐나다인들과 인도인까지 나와 작지 않은 몫을 하고 있다. 시간 많을때 한번 정리해봐도 재미있을 변주의 연속이고, 다음 버젼에선 또 어떻게 바뀔지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주류 장르영화의 내용과 주제란 인간의 본성이 불변하듯 변함이 없는 부분이고, 문제는 시대감각에 맞도록 어떻게 재구성해 내보이느냐가 아닌가 싶다. 요즘 같은 때에도 비판 의식이라곤 하나 없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에 기대기만 한 이런 이야기가 호평을 받을 수 있다는데에 좀 심심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간만에 부담없이 보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없이 권할 만한 영화 한편이 나온 것은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1997.03.14 @ hitel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0 :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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