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극장에서 마지막회로 "엑조티카"를 보았다. 아톰 에고이안이라는 감독이 만든 캐나다 영화로 푸른색이 주조로 된 영상과 독특한 배경음악이 제목처럼 엑조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실존적인 고민들을 안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봤다. "나인 하프 위크" 이후로 제대로 만들어진 에로티시즘 영화를 본 기억이 별로 없던 차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제치고 먼저 보게 되었다.

"엑조티카"라는 클럽과 반라의 스트리퍼들은 사실상 이영화에선 그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교 건물과 주인공들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과 같은 극의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쇼걸"에서 스트리퍼들이 사실상 영화의 모든것이었던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이 영화에 담겨진 에로티시즘은 단지 나같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떡밥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큰 감동과 충격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엑조티카"의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는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과 많이 달랐고, 그덕에 좋은 영상체험이 되었다. 어쩌면 진부한 스토리일 수도 있는 내용을 서로 다른 서넛의 시간대로 복잡하게 재구성하고, 불필요한 사족들을 왕창 절제해 버린 자신감있는 연출력, 여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기술적 노력 등이 이 영화를 다른 범작들과 구별되게 해주고 있다. 영화관에 나올때 딱 정리가 되지 않아 두고두고 기억의 창고에서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더구나 시각적으로나 내러티브 상으로나 지루해지지 않는 영화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으니 이정도면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해줘도 무방하리란 자신감마저 든다.

무슨 부담스런 교훈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까 보았던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과 상상력이 끊이지않는 즐거움이 지속적으로 남는다. 등장인물들의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엑조티카"를 구성해 보기도 한다. 맛있는 과자를 책상속에 숨겨놓고 조금씩 아껴 먹듯이 아직은 딱히 이렇다고 말하기 싫을 정도다. 굳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하나 집어 보자면, 주인공인 세무원을 중심으로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을 이해해 주는 누군가'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그가 "엑조티카"를 즐기지 못했던 이유인 동시에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을 앗아간 디제이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끌어 안게 되는 동기가 된다.

대단히 강한 인상으로 남는 장면은 역시 마지막 시퀀스이다. 이 파편화된 영화는 여기에 이르러야 모든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먼저 있었던 이야기를 내내 감추고 있다가 영화 상으론 가장 마지막에 보여줌으로써 중간에 섣불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든가 끝내 못참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우를 범하지 못하게 관객을 비행기 안전벨트마냥 자리에 꽉 죄어 놓은 것이다.

어이없게도 동아극장의 성의없는 운영은 영화의 마지막 테이크에서 저며오는 가슴을 쓸고있는 관객에게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록 강요하는 차렴치한 짓-여주인공은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스크린을 커텐으로 닫아 버렸다!!!-을 자행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시종일관 아리송한 내러티브를 결정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아울러 디제이의 반복되는 멘트, "여학생이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정확한 건가?)를 비롯해서 영화 전편에 무성의 한듯 던져진 수많은 암시들이 다음의 한가지로 통합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상실이다.

등장인물 모두는 다들 뭔가를 상실했다. 세무원의 엄청난 상실을 비롯해서 여주인공, 디제이, 심지어 애완동물가게의 호모까지 뭔가를 상실하고 있다.(그게 뭔지는 보면 안다) 무라까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 (물론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와는 달리 "엑조티카"에서 남자 주인공의 상실은 너무나 구체화되어있지만, 전반적인 공통분모는 어떤 '관계'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이 상당히 탄탄하지 않고서는 이런 드라마는 나오기 힘들다는게 나의 생각이지만, 그것을 독창적인 방법론으로 관객에게 한편의 영화로서 보여준 감독의 재능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했던 에로티시즘을 만족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이 영화가 받았다고 하는 영화제의 상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1996.03.20 @ hitel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0 :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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