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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두번째 장편, "피도 눈물도 없이"를 비디오로 보았다.

영화 자체는 신세대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류승완 감독의 재능이 마음껏 발휘된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처음은 불법 투견 도박장을 배경으로 속도의 완급을 쥐락펴락하는 편집 스타일이 가이 리치의 그것과 너무 흡사해 실망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다소 지루했던 중반을 지나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이전 세대의 액션영화 감독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류승완 자신만의 역량을 한껏 과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달라진 제작 환경 덕분이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일이겠지만 류승완의 행보는 퀀틴 타란티노와 상당히 비슷하고 그 자신 역시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퀀틴 타란티노가 저예산 영화 "저수지의 개들"로 인정을 받고 차기작 "펄프 픽션"으로 당대 최고의 영화 작가의 반열에 올랐던 것을 은연 중에 모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이어 제대로된 투자 예산을 확보하고 만들 수 있었던 "피도 눈물도 없이"에 수많은 70년대 액션 영화배우와 TV탤런트들을 캐스팅해 온 것은 그런 증거가 아닌가 싶다.

어느새 잊혀져 가던 이혜영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불행히도 류승완의 선택은 퀀틴 타란티노가 "재키 브라운"에서 저질렀던 실수와 비슷할 뿐이다. 남편이 떠넘기고 사라진 노름빚에 시달리며 택시 운전을 해야하는 여성 전과자 역에 이혜영의 마스크와 노쇠한 연기 스타일은 영화 후반부의 과격한 액션씬 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영화판의 흥행제조기 중 하나인 전도연 역시 새로운 연기 세계에 도전하는 것이 좋긴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를 통해 새롭게 증명된 것은 전도연이 영화 흥행의 부적은 아니라는 점 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칭찬받아야 할 사람은 오직 정재영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박봉곤 가출사건"에서의 단역 이후 "기막힌 사내들"(1997)을 통해 장진 감독과 함께 실질적인 영화 데뷔를 한 정재영은 이후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등의 흥행작에 꾸준히 출연해 오면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애매한 마스크의 배우였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확실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얼굴이다. 네 명의 킬러가 똑같이 주인공이었던 "킬러들의 수다"에서조차 영화 홍보에서 만큼은 뒤로 밀리던 그가 나는 내심 안타까웠던 거다.

하지만 "파이란"과 "취화선"이 최민식의 영화이듯 "피도 눈물도 없이"는 확실하게 정재영의 영화다. 이혜영과 전도연을 이야기를 이끌기 위한 주연일 뿐 연기의 양질 모든 면에서 관객을 충족시키는 배우는 정재영 한사람 뿐이란 말이다. 치아에 은보철까지 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 속의 '뼈 속까지' 돌깡패, 불독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정재영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이"를 구성하는 영화적 요소들 가운데 가장 값진 성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ps. 류승완의 바로 앞세대 액션영화 감독이었던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1994)에서 뺀질한 코미디 이미지로 영화를 망친 박중훈을 대신해 정재영을 넣을 수 있었더라면 "게임의 법칙"은 90년대의 클래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2002.07.21 @ movie.daum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1 :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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