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진 사례가 예상되는 주말을 피해 평일 저녁을 골라 "스파이더 맨"을 봤다.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뻔한 스토리겠지만 즐겁게 보면 그만인 영화는 즐겁게 봐주마 하며 관람하였다.

"스파이더 맨"을 놓고 작품성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샘 레이미가 제아무리 호러 감독 출신이었다 하더라도 최근 몇 년간 보여준 그의 작품 경향을 생각해 보면 직접 각본을 다듬지도 않은 바에야 팀 버튼의 배트맨처럼 뭔가 다른 재해석을 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쩌면 연출 계약서에 '니 맘대로 찍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을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스파이더 맨"은 다른 누가 감독을 했었다 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다행히 샘 레이미는 범작조차 제대로 못만드는 재능없는 범생 감독들과 달라서 그나마 무지하게 지루할 뻔했던 미국형 수퍼 액션 히어로의 탄생 스토리를 나름대로 군더더기 없이 잘 그려 주었다.

"스파이더 맨"은 마블 코믹스가 탄생시킨 70년대의 수많은 영웅들의 탄생 설화와 남다른 초능력에 얽힌 선행들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여기에 주인공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슴 속 깊이 간직해온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과 '위대한 능력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삼촌의 유언적 교훈 이야기를 적당히 섞어 놓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분명한 한가지를 인상적으로 남겨주는 데에 있어서는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 뉴욕의 마천루 사이를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의 고공비행도 눈요기 거리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못되고 있다. 관객들 대부분이 "매트릭스" 이후 왠만한 스펙타클이 아니고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일종의 증후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이더 맨"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최상의 캐스팅과 선택받은 이들 배우들의 연기가 볼만 하다.

"스파이더 맨"의 주인공으로서 토비 맥과이어의 존재 의미는 영화 완성도 자체를 탄탄하게 바쳐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막중하다. 그가 스턴트 연기까지 다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스스톰" 이후 "라이드 위드 데블", "원더 보이스" 등의 작품을 통해 일종의 반영웅의 캐릭터를 구축해온 그가 스파이더맨의 역할을 맞게 됨으로써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아쉬운 점은 탁월한 성격파 배우로서의 그의 재능을 100% 발휘하기엔 구성 자체가 너무 느슨했다는 것. 이런 면에선 팀 버튼의 배트맨을 통해 연기 인생 자체가 바뀐 마이클 키튼의 경우가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윌리엄 데포는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 가면을 뒤집어 쓰고 이전에는 한번도 선보인 일이 없었던 장르 영화의 악역을 무난히 해냈다. 포악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가 맡았던 역들은 사실 대부분이 선량하거나 속이 깊은 인물들. 출세작인 "플래툰"을 비롯 심지어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마지막 유혹"에선 예수의 역까지 했던 그가 아닌가. 그렇다고 악역에 재능이 없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에서는 보기만 해도 진저리 쳐질 만큼 끔찍한 '악' 그 자체인 인물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스파이더 맨"에서는 일종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오스본/고블린의 캐릭터를 능란한 연기력으로 잘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의 상대역 엠제이(Mary Jane, 이 얼마나 만화적인 이름인가)는 토비 맥과이어처럼 그간 마이너 작품들에서 주목을 끌어 왔던 커스틴 던스트.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지만 서양인 답지 않은 광대뼈와 작은 눈, 퍼진 코, 삐쭉삐쭉한 치아... 개성 그 자체다. 리즈 위더스푼이나 줄리 스타일스도 이 여자 앞에선 그저 귀엽고 참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커스틴 던스트의 경우 첫 극영화 출연작 "뉴욕 스토리"에서의 아역 이후 꽤 비중있는 조연을 계속 맡아 왔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대부분 여주인공을 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배우는 윌리엄 데포의 불행한 아들로 나온 제임스 브랑코. 토비 맥과이어나 커스틴 던스트에 비하면 아직 신인에 불과하지만 이래뵈도 지난번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제임스 딘 전기영화로 TV/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신성이다. 시상식 녹화방송에서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스파이더 맨"에서의 조연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속편에서 그의 더 나은 활약이 기대되는 건 '내 아버지를 죽인 스파이더맨에게 복수하겠다'던 마지막 대사.

이렇게 영화 자체의 아쉬움을 배우 이야기로 떼워야 하는 "스파이더 맨"에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잘한 일이 한가지 있다. 영웅의 길을 가기 위해 마침내 찾아온 첫사랑을 거절해 버린 것.

잘했어, 스파이더맨. 속편에선 반드시 좀 더 이쁜 연인을 만나게 될 거야. 배트맨 형도 그랬잖아. ^^;

2002.05.10 @ cineseoul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0 :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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