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페이스풀>이란 영화가 곧 상영된다는 사실은 인터넷 배너광고를 통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특별히 다이안 레인의 열렬한 팬인 것도 아닐 뿐더러 영화의 제목이나 광고 카피에서 '또한편의 불륜 소재 에로영화가 나왔나 보다'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불과 며칠 전에야 이 영화가 애드리언 라인(Adrian Lyne) 감독의 신작인 것을 알고 개봉 첫주말, 극장을 찾았다.

애드리언 라인. 한때 알란 파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국 CF 감독 출신 영화 감독이 아닌가. <플래쉬댄스>('82)는 연출을 누가 했는지 별관심이 없었던 때에 본 영화(지금 생각해 보니 중딩 때였고 주인공이었던 제니퍼 빌즈만 엄청 좋아했었다)였지만 이후 <나인 하프 위크>('86)와 <위험한 정사>('87)를 통해 애드리언 라인만의 탁월한 영상 감각, 특히 원근감 은은한 화면들 속에 나는 한마디로 푹 빠져 버렸었다.

하지만 영화 연출가로서 애드리언 라인의 재능은 어쩌면 이쁜 화면 만들기 하나에만 국한된 것인지도 모른다. <야곱의 사다리>('90)와 <은밀한 유혹>('93)은 극장 개봉을 하자마다 달려가 관람했던 영화들이었지만 그의 영상미가 여전히 당대 최고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시각적 요소 이외의 다른 부분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제공이나 강렬하고 도전적인 주제 의식, 또는 완벽한 연출과 배우의 역량에 의해 창조되는 등장인물의 완벽한 캐릭터 등 한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얻어 낼 수 있는 다양한 부분들에서는 상당히 빈약했던게 사실이었다.

애드리언 라인은 점차 영화에 대한 내 관심의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었다. 나는 그의 가장 최근 영화였던 <로리타>('97)만 해도 개봉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가 조용히 비디오로 출시되었을 때에야 그게 애드리언 라인의 영화라는 것을 알았고 그나마도 한참을 미루고 미루다가 우연히 빌려 보았다. 기대를 전혀 안했던 탓이었을까. <로리타>는 상당히 좋았었다. 애드리언 라인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었고 영화 구석구석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객관적인 흥행 성적 면에서 완전한 참패였다고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로리타>를 통해 애드리언 라인를 어느 정도는 되찾은 셈이 되었다.(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구닥다리 보다 애드리언 라인의 <로리타>가 훨씬 좋다)

<언페이스풀>은 이렇게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해왔고 또 잊었다가 다시 되찾은 감독의 신작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직전에는 이 영화가 또다른 옛날 영화의 리메이크라는 사실과 다이안 레인 뿐만 아니라 리차드 기어도 나온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언페이스풀>은 외관상 아주 모범적으로 보이는 어느 가정의 일상에서 출발해 한 남편의 아내이자 어린 아들의 어머니인 여주인공이 낯선 남자와의 육체적 사랑에 휘말리게 되다가 끝내는 파국(대부분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문제는 <언페이스풀>에서의 불륜 이야기가 어디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는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언페이스풀>은 불륜에 빠진 한 여성의 심리적 갈등이나 그 불륜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시각적 에로티즘 보다는 영화 후반 주인공들이 처음 가정을 시작할 때 가졌었던 이상과 그렇지 못한 지금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동시에 끌어안게 되는 고통스런 과정과 결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영화 초반 초라하기 그지없던 리차드 기어의 역할은 단연 돋보이게 된다. (이 관점이 아니라면 이 영화는 화끈하게 보여주지도 않는 '말로만' 에로 영화가 되고 만다)

영화 자체가 좀 오래된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라고는 해도 영화가 견지하는 시각 자체는 고리타분하다. 미국 중산 백인층을 주관객으로 한다고 했을 때 불륜의 상대자가 영어도 서툰 찐득한 스페니쉬 남성인 것부터 시작해서 그의 상대 여성이 한둘이 아니라는 부분,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고보니 아내와 별거 중인 유부남라는 점... 은근히 '그 놈이 나쁜 놈'이라는 식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문제 상황에 빠진 주인공 부부에게 좀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된다.

좀 유치하다 싶을 정도의 전통적인 상황 묘사 역시 애드리언 라인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남편이 아내의 외도를 확신하게 되는 시점이 되자 그날 저녁 먹을 닭요리가 숯덩이가 되고 스파게티 냄비는 끓어 오른달지 하는 부분 등이 너무 낯간지럽다. 이런 식의 유치함이 절정에 다다르는 장면은 역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잠든 아들을 뒤에 태운채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 해외로의 도피를 결심하는 부부 앞에는 빨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때마침 그 옆은 경찰서 네온사인이 불을 밝히고 있는 작위적인 미장셴이 그것이다.

이안 감독의 <아이스 스톰>('98)이 70년대 미중산층의 문제를 정면으로 발라낸 수작이었다면 애드리언 라인의 2002년 신작은 같은 가정 내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21세기의 그들에게 한가닥 위로라도 되어 주고 싶었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외도 장면이 찍힌 사진들을 벽난로에 태우며 그때 그순간 그냥 택시를 타고 깨끗하게 헤어졌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주인공의 상상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부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겠다.

18세 미만 청소년이 관람하더라도 영화가 주는 최종적인 메시지가 충분히 교훈적이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을 정도로 덜 자극적이고 놀랍도록 보수적인 영화가 <언페이스풀>이다. 영화의 이런 무게 중심이 자신의 취향에 잘 맞거나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언페이스풀>은 상당히 완성도 높은 수작으로 봐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관객은 불륜으로 가는 과정의 아슬아슬함이나 땀내 나는 정사씬을 기대할 터인데... 다이안 레인이 나이에 맞는 아름다움을 과시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성에 차기 힘들 거다.

다시 3, 4년 후에도 애드리언 라인에게 영화 연출의 기회가 주어질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에도 극장을 찾을 것 같다. 오랜 친구는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끝까지 같이 가보는 거니까.

2002.08.25 @ cine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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