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개봉영화들 가운데에는 만들어졌거나 수입된 시점이 2년 이상된 소위 '창고 영화'들이 다수 섞여 있습니다. 어떤 작품들은 늦게나마 정식 개봉되어서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오게 만들 만큼 좋은 작품들도 있지만 또 어떤 작품들은 극장가의 불황기를 틈타 그야말로 '악성 재고' 처분 성격의 개봉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영화가 널리 알려진 경우 보다 비교적 덜 알려진 상태에서 조용히 개봉하는 작품들 가운데 오히려 알짜가 많다는 건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작은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작품이라고만 할 수도 없더라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영화를 고르고 제대로 볼 줄 알는 관객 스스로의 감식안이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됩니다.

11월 한 달 동안 32개의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4주에 32편이면 한 주에 8편 꼴로 편수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았던 한 달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9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 중에서 부문별로 베스트라 생각되는 작품들을 꼽아봤습니다.


이달의 영화 (Movie of the Month)
렛 미 인 (Låt Den Rätte Komma In, 2008), 11/13 개봉


11월 개봉영화 베스트는 큰 고민 없이 바로 선택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바로 선택했다기 보다는 진작부터 '이 영화는 이달의 영화감이다'라고 점찍어 놓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2004년에 출간된 욘 아즈비데 린퀴비스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시나리오도 원작자가 직접 썼네요), 12살 외톨이 소년과 같은 또래의 이웃집 벰파이어 간의 사랑 이야기를 80년대 어느 겨울 스웨덴의 설경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청각적인 효과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키곤 하는 다른 공포영화들과는 달리 서정적인 배경음악 등을 활용해 차분하게 등장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동화처럼 영화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맺어지면서 끝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종'과의 사랑을 선택한 주인공들의 앞날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달의 남자배우 (Actor of the Month)
마이클 케인 & 주드 로 @ 추적 (Sleuth, 2007), 11/20 개봉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성공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추적>도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실력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만년 조연배우로 인식되고 있는 노년의 마이클 케인과 아직 젊지만 더이상 '매력적인 배우'로 손꼽히지는 못하고 있는 주드 로는 <추적>을 통해 가장 뛰어난 주연급 연기자들로서의 역량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 인물들의 감정 흐름이 다소 과장될 수 밖에 없는 연극적인 특성으로 인해 작품 자체는 관객들로부터 그리 큰 호응을 얻어내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두 배우의 연기 만큼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달의 여자배우 (Actress of the Month)
리나 레안데르손 @ 렛 미 인, 11/13 개봉


마이크 리 감독의 <해피 고 럭키>(2008)를 보았다면 이달의 여자배우가 바뀌었까요. 아무튼 제가 본 8편의 11월 개봉영화들 가운데에서는 <렛 미 인>의 이엘리, 리나 레안데르손(Lina Leandersson)을 이달의 여자배우로 꼽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순백의 미모를 과시했던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와 흑백의 대조를 이루었던 리나 레안데르손의 외모는 북구의 것이라기 보다는 남미나 동유럽의 집시를 연상케하죠. 1년 여의 캐스팅 과정을 통해 스웨덴을 다 뒤져서 찾아냈다고 하는 감독의 말이 허풍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성별과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이엘리의 이미지를 리나 레안데르손이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거세된 소년인 이엘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리나 레안데르손의 목소리에 다른 소년의 목소리를 합성했다고 하는군요.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이엘리의 파란 눈빛도 물론 컬러 렌즈를 사용한 것이고요.


이달의 이야기 (Story of the Month)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카페 (Cafe de Los Maestros, 2008), 11/6 개봉


아르헨티나 누에보 탱고(감상용 연주 음악으로 발전된 형태의 탱고 음악)의 거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콜론 극장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겠다는 Cafe De Los Maestros 프로젝트의 준비 과정과 콘서트 장면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였죠. 연주자들이 녹음실에서 모여 연습하는 장면 사이사이에 인터뷰와 옛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이 삽입되고 이따금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의 풍경들도 비춰지는 정도일 뿐, 특별히 플롯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없는 평이한 구성의 작품이었습니다만 그런 단순함이 오히려 영화의 진짜 주인공들과 관객들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달의 이야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카페>에 등장하는 노년의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탱고에 관한 그들 각자의 이야기들입니다. 브라질 출신의 월터 살레스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제작하고 TV 쪽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미구엘 코핸이 직접 촬영과 연출을 맡은 작품입니다.


이달의 비주얼 (Visual of the Month)
렛 미 인 (Låt Den Rätte Komma In, 2008), 11/13 개봉


시각적 이미지라는 측면에서는 다들 고만고만한 영화들이었던 가운데 기왕이면 <렛 미 인>의 설경을 이달의 비주얼로 꼽아주고 싶네요. 경제 침체에 빠져 다들 살아가기가 녹록치 않았다고 하는 스웨덴의 8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겨울의 풍경과 적절한 인물 클로즈업의 배합을 통해 주인공들의 고독감을 잘 전달해낸 호이트 반 호이테마의 카메라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연출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정성을 부각시키는 배경 음악의 사용을 조금 자제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대중적인 호소력이라는 측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연출자의 의도는 아름다운 설경과 배경 음악의 배합을 통해 목표로 했던 바를 120% 달성해내고 있습니다.


이달의 영화음악 (Music of the Month)
Johan Söderqvist, Eli's Theme @ 렛 미 인 (2008), 11/13 개봉



작품 전체적인 배합에 있어서는 너무 많이 사용했다는 의견이지만, <렛 미 인>에 사용된 음악 자체는 나무랄데 없이 좋은 곡들이었죠. 스웨덴 출신의 영화음악가 요한 쇠데르크비스트의 오지지널 스코어 중에서 Eli's Theme을 찾아봤습니다. 앞뒤 설명을 생략하고 음악만 듣고 있어도 감정이 마구 일어나는 종류의 곡입니다.

11월은 비주얼에 있어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던 반면,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작품들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 다큐멘터리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클럽>의 OST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고요, <바시르와 왈츠를>에 사용된 곡들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훌륭한 컴필레이션이 되었죠. <눈먼 자들의 도시>와 <추적>에 사용된 곡들도 무난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11월 개봉영화 전체


Posted by 신어지 Trackback 0 : Comment 1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g 2008.12.07 10:58 신고

    [렛미인]에 올인하셨군요.
    확실히 이엘리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이엘리의 목소리에 그런 전략(?)이 숨겨져 있는줄 몰랐습니다. 이미지나 목소리나 아무튼, 상당히 끌리던 스타일이더라는^^. 이것마저 없었음 뭐에 낚인 저로서는 (그날의 정황상)푹~~~~~~잤을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ㅋ~
    '이달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이달의 비주얼'을 보니 [이터널 선샤인]이 뜬금없이 떠오르는건..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12.07 11:28 신고

      영화들이 대체로 고만고만했던 가운데 <렛 미 인>은 오감과 생각까지 만족시켜주는 작품이라서 '올해의 영화'라 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그럼 <다크 나이트>는? 하게 되겠지만. ㅋ <이터널 선샤인>도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고 존 브라이언의 음악도 무척 좋았었죠. 2005년 개봉이었으니 벌써 3년이 되었군요. ^^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g 2008.12.07 18:24 신고

    [이터널 선샤인]은 극장관람을 못하고 집에서 보았는데 그다지 뚜렷한 기억이 없었습니다만 님의 네모블로그에 포스팅해 놓으셨던, 어렴풋이 떠오르는 글과 그 사진의 잔상은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죠. 참, 감성적이고 섬세한 여자인가보다. 라는~~~~~ㅋ
    제 입장에선 [다크 나이트]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면을 부각시킨 영화이고 [렛미인]은 조용히, 그러나 너무나 잔인하리만큼 사랑을, 삶을 파헤쳐버린 - 판타지를 필두로하여 안심을 시켜놓고 바로 뒷덜미를 내리치는 - 현실적인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이만 퇴근~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12.07 23:24 신고

      저는 <이터널 선샤인>하면 모 영화 모임에서 다함께 관람했던 생각이 납니다. 당시 네모 블로그에 작가로 활동하시던 분의 감수성이 참 뛰어나셨죠. 지금은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사신다더군요. (저는 댓글 담당자입니다만)

      주말도 없이 고생 많으십니다. <렛 미 인>이 판타지를 빌미로 사랑과 삶을 잔인하게 파헤쳐놓은 작품이라는 데에 100% 공감합니다. 좋은 한주 되시고요. ^^

  3.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김치군 2008.12.07 20:58 신고

    저도 렛미인... 정말 맘에드는 영화였습니다 ^^..
    갑자기 볼 영화가 없어서 봤었는데.. 모래속에서 보석을 건진듯한 기분이었달까요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12.07 23:25 신고

      영화관에 가셔서 우연히 고른 영화가 <렛 미 인>이셨다면 그야말로 '심봤다' 하셔도 되겠어요. 모래 속에서 보석, 정말 맞는 표현입니다. 영화는 많지만 정말 괜찮은 영화가 별로 없는 요즘 같은 때에 <렛 미 인>은 그야말로 반짝반짝하는 작품이죠. ^^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losstime 2008.12.08 12:29 신고

    신어지님의 [렛미인에 보내는 찬사]엔 저도 참으로 공감합니다. 너무 아름답게(?) 사랑을 보여줘서, 아냐, 이게 다가 아닐거야, 라는 생각을 한참 하긴 했지만, 투명하게 아름다운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아요 :-)
    그나저나 추적이 생각보다 좋은 모양인데, 찾아보고싶은 마음이 문득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08.12.08 16:18 신고

      그냥 아름답기만 한 사랑 이야기는 아닌 것이 분명해요. 감독 인터뷰에서 '어디까지나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 건 분명 혹시나 관객 떨어질까봐 했던 얘기라고 생각해요. 노골적으로 들이밀지는 않았지만 '지독한 사랑'에 관한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추적>은 별다른 내용이 있다기 보다는 그저 두 배우가 하는 거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거운 쪽이었어요. 생각보다 흥행이 안좋았던 것 같은데 그러니 더욱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고 싶어지네요. ^^

  5. addr | edit/del | reply 보가트 2010.08.20 22:00 신고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리더로 있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최고의 뮤지션들로 구성된 일렉트로 탱고밴드 바호폰도Bajofondo의 서울 공연이 8월 28일 7시 악스홀에서 있습니다. 구스타보가 자신의 영화음악을 직접 연주도 한다고 하네요 ^^

    • addr | edit/del BlogIcon 신어지 2010.08.20 23:46 신고

      열심히 홍보하시네요. 공연 일주일 전인데 아직 빈자리가 많더군요.



티스토리 툴바